[들꽃산책] 풀과 나무에게 말을 걸다

[이소영의 도시식물 탐색] 크고 질긴 잎의 놀라운 능력

푸레택 2022. 2. 10. 22:22

[이소영의 도시식물 탐색] 크고 질긴 잎의 놀라운 능력 (daum.net)

 

[이소영의 도시식물 탐색] 크고 질긴 잎의 놀라운 능력

[서울신문]식물세밀화를 그리는 동안 나는 꽤 많은 식물과 마주했다. 식물 중에는 우리나라에 자생하거나 재배하는 식물도, 우리나라에선 본 적 없는 외국 식물도 있었다. 캄보디아 열대우림의

news.v.daum.net

[이소영의 도시식물 탐색] 크고 질긴 잎의 놀라운 능력

파초과의 식물인 바나나는 열매를 얻기 위해 재배됐지만 함께 피어나는 꽃은 요리의 재료가 되기도 한다. 바나나잎은 포장재와 접시 등 생활용품으로 두루 쓰이고, 뿌리는 약재로도 쓴다. 식물세밀화를 그리는 동안 나는 꽤 많은 식물과 마주했다. 식물 중에는 우리나라에 자생하거나 재배하는 식물도, 우리나라에선 본 적 없는 외국 식물도 있었다. 캄보디아 열대우림의 넓은잎과 노르웨이의 날카로운 바늘잎처럼 생소하고 낯선 식물을 그릴 때 나는 종종 새로운 고민에 빠지기도 했다.

바나나잎은 대체로 진녹색인데, 흰색이 섞이거나 자주색과 연두색이 섞인 품종도 있다.


3년 전 뉴질랜드 토착식물인 ‘뉴질랜드 플랙스’를 그릴 때였다. 어렵게 통관돼 받아 든 이 식물은 전체 키가 3m에 가까웠고, 잎 한 장이 내 키만 했다. 이것을 다 그리고 표본으로 누르는 것도 문제지만 무엇보다 그림을 그리려면 원래 식물보다 크게 그려야 하는데, 생체가 거대하니 어떤 구도로 그려야 할지 여간 고민이 아니었다. 결국 잎을 10분의1로 축소하고, 뿌리 일부분만 그림에 넣기로 했다.

다시 뉴질랜드로 보낼 표본을 누를 때에도 잎을 여섯 조각내어 번호를 매긴 후 신문지 사이에 말렸다. 표본이 마르는 사이에도 나는 여러 번 신문지를 들춰 혹여 썩는 부분은 없는지, 표본이 잘 눌러졌는지 확인해야 했다. 수분이 많은 잎이나 꽃은 잠시만 소홀해도 색이 까매지고 썩기 쉽기 때문이다. 아열대의 거대하고 두꺼운 잎은 내게 까다롭고 어려운 상대다. 물론 이 커다란 잎들이 세상 모두에게 까다롭고 거추장스러운 존재는 아니다. 더욱이 지금과 같은 시기엔 말이다.

지난해 여름 친구를 만나러 베트남 호찌민으로 짧은 휴가를 다녀왔다. 베트남에서 직장에 다니는 친구는 평소에도 그곳 식물 사진을 내게 자주 찍어 보내 줬다. 하루는 집 앞 화단에 바나나 줄기 덩이가 떨어졌다며 회사에 가져가 덜 익은 바나나를 조미료에 찍어 먹는 사진을 보내왔고, 또 어느 날은 파파야를 나물처럼 무쳐 먹는 사진을 보여 줬다. 베트남 사람들은 우리와는 다른 방식으로 식물을 이용하고 있었고, 나는 사진으로만 접한 것을 실제로 보고 싶었다.

호찌민에서 만난 우리는 쌀국수집부터 갔다. 들어간 식당에서 내준 물병엔 마개 대신 돌돌 말린 바나나잎이 꽂혀 있었다. 내가 놀라자 친구는 이곳에서 바나나잎을 이렇게 쓰는 건 흔한 일이라며 대수롭지 않은 듯 이야기했다. 유난스러운 건 나였다. 여행을 하는 동안 식탁에 수저받침 대신 놓이고, 마트와 시장 진열대의 채소를 포장하며, 도시락통으로 쓰이는 바나나잎을 자주 봤다. 우리가 늘 쓰는 비닐과 종이, 플라스틱의 역할을 이곳에선 바나나잎이 해내고 있었다.

바나나는 필리핀과 인도 등 아시아에서 주로 재배되는 세계의 대표 과일 중 하나다. 세계에 수출되다 보니 바나나 재배지는 넓고, 원주민은 바나나 열매가 수확되기까지 성장해 떨어지는 바나나잎을 자연스레 생활에서 이용하게 된 것이다. 내게 주어진 자원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 이것이 민속식물의 정체성이자 바나나잎이 생활에 활용된 이유다.

바나나잎은 내 얼굴보다 훨씬 크고 두꺼우며 섬유질이 많아 질기다. 그래서 나는 이런 넓은잎 식물을 그리기가 부담스러웠지만, 같은 이유로 바나나는 접시와 포일의 대안이 될 수 있었다. 잎 표면에는 왁스와 같은 코팅이 돼 있어 방수가 잘돼 비닐의 역할도 할 수 있다. 게다가 접시와 그릇은 아무리 깨끗하게 닦아도 세제가 남기 마련이지만 바나나는 먼지가 잘 달라붙지 않기 때문에 물로만 닦아도 깨끗하고 다 쓰면 100% 생분해된다. 동남아 사람들은 식재료를 찌거나 구울 때도 바나나잎에 싸서 요리하는데, 이렇게 하면 특유의 달콤한 향도 내면서 안의 재료를 촉촉하게 유지해 준다고 한다. 무엇보다 재료의 영양분 파괴를 줄일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물론 바나나만이 이런 역할을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비슷한 재질의 판단잎이나 코코넛 껍질, 대나무와 연잎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주로 이용해 왔던 짚처럼 식물을 포장재나 그릇으로 활용한 게 베트남에 한정된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과학기술이 발달한 나라일수록 사람들은 더 편리하고 특별하고 새로운 것을 찾으며, 그렇게 자연과는 멀어지게 마련이다. 그나마 최근 지구 온난화와 코로나19로 인한 쓰레기 문제를 경험하면서 우리는 이제 자각을 시작한 듯하다.

물론 우리나라에서 바나나를 병마개나 포장지로 쓰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만한 양의 바나나잎이 생산되지 않는 데다 수천년간 이어 온 동남아 원주민의 생활 방식을 갑자기 따르는 것도 무리다. 다만 중요한 것은 마트와 시장에서 비닐로 깨끗이 마감된 채소 대신 식물의 잎으로 포장돼 있는 식재료를 선택할 수 있는 마음, 조금 더 불편하고 덜 깨끗해 보일지라도 500여년간 썩지 않을 스티로폼 대신 약간의 수고를 감내하는 태도다.

이소영 식물세밀화가 서울신문 2020.0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