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영의 도시식물 탐색] 영원의 식물, 신문의 쓸모 (daum.net)
[이소영의 도시식물 탐색] 영원의 식물, 신문의 쓸모
2004년 일본 도쿄대 종합연구박물관에서 특별한 전시가 열렸다. 1904년부터 1945년까지 발행된 신문에 관한 아카이빙 전시였다. 다소 평범해 보이는 이 전시가 식물학계에서 특별하게 회자되는 것은 전시 작품 중 식물학자의 신문이 포함됐기 때문이다. 식물학자의 글이나 기사가 게재된 신문이 아니라, 식물학자 마키노 도미타로가 식물 표본을 만들면서 이용한 흡습지로서의 신문이다.
지난날 내가 일했던 국립산림생물표본관의 표본실 장에는 식물 표본이 가득 쌓여 있었다. 연구자들이 전국을 돌며 조사하고 채집한 식물은 표본제작실을 거쳐 수분이 빠진 납작한 표본이 되고, 이것은 식물의 시공간적 증거로서, 또 연구자들의 연구 데이터로서 활용됐다.
1500년대에 제작된 가장 오래된 식물 표본책에는 약용식물 연구 목적으로 채집된 오레가노(왼쪽)와 타임(가운데) 그리고 관상용 알뿌리식물인 수선화(오른쪽), 아네모네 등이 기록돼 있다.
표본제작실에서 가장 중요한 재료는 신문이었다. 흡습성이 뛰어나고 곰팡이를 방지하는 효과가 있다. 나는 식물을 그리다가도 채집을 갔던 동료가 돌아오면 채집 봉투에 가득 담긴 식물들을 신문지에 하나씩 고이 끼워 두고, 다음날 또 그 다음날 다른 새 신문지에 갈아 끼우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짧게는 반년, 길게 수년이 지나면 식물은 수분이 다 빠진 상태가 되고, 이것을 라벨과 함께 흰 시트에 붙이면 온전한 표본이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표본은 색은 변할지언정 형태를 유지한 채 길게는 수백 년간 보관될 수 있다.
어릴 적 좋아하는 책 사이에 네 잎 클로버나 고운 단풍잎을 끼워둔 기억이 다들 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 다시 그 페이지를 펴면 단풍잎은 수분이 다 빠져 빳빳해져 있다. 마른 잎은 수십 년이 지나도 형태가 변하지 않는다. 이것이 식물을 가장 오래 보관할 수 있는 방법, 식물 표본을 만드는 방법이다.
종이를 만드는 데 사용하는 나무로는 소나무, 전나무, 가문비나무, 낙엽송 등 침엽수가 많다. 그림은 전나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식물 표본은 1500년대 이탈리아 약초가이자 예술가인 라르보 시보가 제작한 표본 책으로 추정한다. 현재의 표본과는 조금 다른 형태로, 도화지 하나에 식물을 하나씩 붙인 게 아니라, 책 형태로 페이지마다 채집한 식물 표본을 붙여 엮었다. 이 식물 표본은 인류가 식물을 연구한 최초의 목적과 마찬가지로 약용식물 목록이다. 표본 책에는 현재도 우리가 차로 즐겨 마시는 타임과 요리 재료인 향신료 오레가노 같은 허브식물, 그리고 수선화, 아네모네와 같은 관상용 구근식물 표본이 500년이 지나도 제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이렇게 책 형태로 제작됐던 표본이 지금과 같은 개별 표본으로 제작 방법이 바뀐 것은 표본 책이 새로운 식물을 추가하거나 수정하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현재 세계의 모든 식물연구기관에서는 각 나라의 신문지를 흡습지로 이용해 개별 종이 형태로 표본을 제작한다. 식물학자 마키노도 마찬가지였다. 고치 현립 마키노 식물원에는 생전 그의 방 풍경이 재현돼 있는데 가장 눈에 띄는 건 벽을 가득 메운 높이 쌓인 신문지다. 신문지를 들춰 볼 순 없었지만, 생전 그의 방에 있던 신문지 사이에는 그가 채집한 식물이 건조되고 있었을 것이다. 식물 중에는 그가 명명한 느티나무와 파초일엽도 있었겠지.
우리가 이름을 알고 있는 모든 식물은 각자의 기준표본과 그 외 무수한 표본을 갖고, 그 표본이 되기 전 모두 신문지 사이에서 건조의 시간을 보냈다. 마키노의 신문이 재발견돼 전시될 수 있었던 것은 마키노 표본을 소장하고 있던 도쿄대 종합연구박물관 관계자가 표본을 정리하면서 수많은 박스 안 마키노의 표본과 흡습지인 신문지를 발견하면서부터다. 그렇게 정리된 신문지는 5000여점이나 됐고, 신문 중에는 우리나라 조선총독부 기관지로서 1945년 종간된 경성일보도 있었다. 이 신문 목록은 ‘마키노 신문 목록’이란 이름으로 중요한 역사적 자료로서 인정받았다.
식물세밀화를 그릴 때 나는 그릴 대상인 식물을 조사하고 채집한다. 그렇게 채집한 식물을 다 그리고 나면 표본으로 만들기 위해 식물을 신문지 사이에 누른다. 그래서 내 작업실 서랍에는 그간 집에서 구독해 보던 일간지부터 내 사정을 잘 아는 친구들이 보내준 대학신문, 길에서 하나씩 받아온 광고 신문이 서랍 하나를 가득 메운다. 종이 신문이 사라질 날이 올까 두려워 나는 더 열심히 신문을 모아왔다.
며칠 전 채집한 표본의 신문을 갈다가 전나무가 끼어 있던 신문 면에 커다랗게 쓰인 ‘담대함’이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이것이 마키노의 신문처럼 중요한 역사적 사료는 되지 못할지언정, 이 메시지가 내게 식물을 더 열심히 기록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다 주었다. 식물은 언제나 작고 흔하고 평범한 것의 소중함을 알려 준다. 그러나 식물을 건조하기 위한 흡습지인 날짜 지난 종이 신문의 소중함까지 알려 줄 줄은 전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이소영 식물세밀화가 서울신문 2020.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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