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영의 도시식물 탐색] 산사나무 작은 열매의 소중함이란 (daum.net)
지금 이 계절 산사나무 열매는 이렇게 빨갛게 익어 간다. 오래전부터 우리나라에서는 산사나무 열매를 그냥 먹거나 술로 담가 음용했다. 잎은 위 건강을 위한 재료로도 썼다.
[이소영의 도시식물 탐색] 산사나무 작은 열매의 소중함이란
계수나무 잎이 노랗게 물들어가는 이맘때면 실내에만 있기 아쉬워 자꾸만 밖으로 나가게 된다. 지금을 그냥 흘려보내면 곧 겨울이 되고 앞으로 6개월 가까이 푸르른 풍경을 볼 수 없을 걸 알기에 내 마음은 더욱 조급해진다. 지금 숲에선 무엇보다 나무의 초록색 잎에 대비되는 붉은 열매들이 눈에 띈다. 새빨간색부터 검정에 가까운 붉은색까지, 색도 크기도 다양한 열매가 내 발목을 잡는다. 열매가 촘촘히 달린 주목과 작은 석류 모양의 해당화 열매, 그리고 흰 꽃이 진 자리에 붉은 열매를 매단 산사나무가 있다.
산사나무의 열매가 붉게 익는 시월이면 나는 작업실 근처 수목원을 찾는다. 그곳의 산사나무 곁에서 붉은 열매를 사진으로 찍기도, 또 얼마간은 나무 아래 가만히 서 있기도 한다. ‘산사나무 아래’라는 영화를 보고 나서부터 그랬다. 중국 문화혁명기를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산사나무 아래 사람들이 서 있는 모습으로 시작한다. ‘산사나무는 원래 흰 꽃을 피우지만 항일전쟁에서 학살당한 열사들의 피눈물로 이 나무는 꽃이 빨갛게 핀다.’ 영화에서 산사나무는 아프고 혼란스러웠던 문화혁명기 시대를 상징한다. 혼돈의 세월, 만 개의 감정이 교차하는 그 시대를 ‘산사나무’라는 한 단어로 가리키고 이해시키는 것, 이것이 나무가 가진 힘이고, 그래서 예술가는 자연물을 작품에 담는 이유일 것이다.
물론 영화의 여운을 느낄 겨를도 없이 나는 열매가 달린 모습을 스케치하고, 열매 크기를 자로 재고, 잎의 색을 확인한다. 지금 이 나무는 잎을 반 정도만 남긴 채 노랗게 물들어 가고, 열매는 검정에 가까운 붉은색으로 익었다. 산사나무를 그리다 보니 중국인 친구가 생각나 오랜만에 안부를 전했다. 친구는 산사나무에 대한 추억을 꺼냈다. 산사나무야말로 중국 사람들이 가장 친근하게 여기는 나무라고. 어렸을 적 마당의 산사나무 열매를 따 먹기 일쑤였고, 마을 어른들은 열매로 술을 빚었다고 했다. 식물엔 관심이 특별히 없지만 산사나무만큼은 잘 알고 있다는 그의 말에, 중국과 산사나무의 관계를 대략은 짐작할 수 있었다.
주목의 붉은 열매는 예부터 생으로 먹거나 술로 담가 항암에 약용했다.
중국 사람들은 산사나무에 ‘믿음’이 있어 줄기의 가시가 자신을 지켜주고 불행을 막는다고 생각해 마당 울타리에 심어 정원수로 애용한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요즘 자주 보이는 중국의 대표적인 간식 탕후루도 원래 산사나무 열매를 꼬치에 끼워 만든 것이다. 이 열매는 소화에 효과가 좋아 탕후루가 아니더라도 마트에서 파는 중국 사탕 중엔 산사나무 열매를 재료로 한 것들이 많다. 산사나무는 중국의 대표적인 민속식물인 셈이다.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이용해 온 식물을 민속식물이라 한다. 식물은 인류의 식량이자 약으로 이용돼 왔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아스피린도 대표적인 민속식물인데, 로마인이 버드나무 껍질을 해열제로 이용하는 것에서 착안해 개발된 것이다. 전통 지식이 잘 보존돼 있는 인도와 중국은 각국 자생식물의 약 40%가 민속 약용식물이지만, 우리나라는 전쟁, 일제강점기 등으로 인해 기록이 부족하고, 최근 도시화되면서 민속식물에 관한 전통 지식을 가진 사람들을 찾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물론 우리나라 식물 연구 기관들에서 2000년대 이후 민속 식물 전통 지식을 꾸준히 수집하고 있다.
언젠가 동료 식물학자가 전국을 돌아다니느라 바쁘다기에 무슨 일로 출장을 가느냐 물었더니 어느 시골 마을의 마을회관에 간다고 했다. 요즘 전국 곳곳의 마을회관을 다니며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듣고 메모를 하거나 녹음을 해 기록하는 것이 그의 일이라고. 강화도의 어느 어르신으로부터 어릴 때부터 고수를 김치로 담았다는 말을, 충북 단양에선 살구나무 씨앗을 말려 먹으면 피부에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연구자들은 이 자료들을 차곡차곡 수집해 증거 자료를 확보하고, 앞으로의 연구 자료로 활용할 것이다.
다시 숲으로 돌아가서, 지금 이맘때 숲에선 붉은 열매의, 유용한 민속식물들을 볼 수 있다. 주목 열매를 강원도에서는 술로 담갔고, 전라도에서는 하열할 때 잎 삶은 물을 약 대신 먹었다. 조금 더 걸으면 보이는 해당화 열매는 전국 곳곳의 술 재료였고, 열매 끓인 물로 불면증을 치료하기도 했다. 그 옆의 산사나무는 중국에서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열매가 빨갛게 익으면 술을 담거나 생으로 먹고, 잎은 위 건강을 위한 약으로 이용해 왔다. 산사나무 열매로 담근 술은 이제 도시의 마트 매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모두 평범한 사람들의 경험을 통해 긴 세월 입에서 입으로 전해 온 전통 지식이다.
가끔은 그 어떤 거대하고 엄청난 결과물보다 작은 것들이 차곡차곡 쌓여 가는 과정이 더 아름답고 소중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식물을 마주하는 일을 하면서 작은 것의 소중함을 여실히 느낀다.
이소영 식물세밀화가
/ 서울신문 2019.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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