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전원일기] 청정하도다(淸情荷道多) (daum.net)
(37) 고향 '직전 마을'서 행복을 빚다.. 김미선 지리산 피아골 식품영농조합법인 대표
[서울신문] ‘나 돌아갈래.’
11년 전인 2005년 대학을 졸업한 김미선(31) 지리산 피아골 식품영농조합법인 대표는 전주를 떠나 고향인 지리산 피아골로 돌아갔다. 고향의 산냄새와 흙냄새, 계곡의 냄새가 너무 그리워 일주일에 한 차례 다니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하지만 젊은 여자가 시골로 돌아간다니 대부분 냉소적이었다.
“능력이 없어서 시골로 가는 거지.”
고향 마을 사람들도 처음엔 의구심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살피곤 했다고 한다.
“젊은 것이 오죽이나 할 게 없으면 산골 오지로 돌아올까.”
김 대표는 여동생만 둘인데 부모님은 세 딸이 미래에는 좋아하는 일 하기를 바랐다. 김 대표는 전주에서 대학을 다닐 땐 애완동물에 매료돼 전공도 애완동물학과를 택했다. 보통이라면 도시 어느 건물에 세를 얻어 애견숍이나 애완견 훈련센터 같은 걸 해야 제대로 길을 걸어가는 것일 텐데, 김 대표는 고향 마을을 도무지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 “다섯 살 때부터 산에서 고로쇠 물 받으며 자라”
해발 600m, 연곡사 스님들이 식량을 대신할 목적으로 ‘피’(벼과의 한해살이풀)를 심어 피밭골로 불린 ‘피아골’. 그 피아골의 원조 마을이 바로 김 대표가 나고 자란 ‘직전(稷田) 마을’이다. 그녀의 고향은 피로 쌀을 대신해야 할 정도로 척박한 곳이었다. 지리산을 찾는 사람들이 없다면 호구 해결이 어려운 동네였다. 그래도 김 대표는 고향인 피아골로 돌아왔다. 노고단으로 오르는 피아골 초입의 직전 마을. 길 양편으로 빽빽한 숲과 나무들, 야생 동물들. 계절마다 분명하게 옷을 갈아입는 산이 있고 밤이면 도시에선 구경할 수도 없는 ‘소금 뿌려 놓은 듯’ 천지에 별이 있고 고요함이 어느 곳보다 깊게 물든 피아골은 그 자체가 문화이고 자산이었다.
김 대표가 도시에서 살다가 고향으로 돌아온 2005년은 그녀의 나이 21살이었다.
“여긴 딱히 지을 농사가 없어요. 그러니 관광객을 상대로 식당을 하거나 민박집을 운영하죠. 가을까진 산에 올라가 나물 채취하고 겨울엔 고로쇠수액을 받아 팔고요.”
그녀는 겨울이 싫었다고 했다. 겨울이면 고로쇠나무에서 수액을 채취하러 산을 오르내려야 했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나무에서 관을 연결해 아래에서 받아 내지만 그 시절에는 한겨울 산으로 올라가 고로쇠 수액을 채취하고는 했다. 그 역시 중요한 수입원이었다.
“다섯 살 때부터 자갈밭을 손톱으로 긁다시피 하며 일을 했어요. 그게 놀이인 줄 알고 자란 거죠. 겨울이면 고로쇠 물 받으러 산으로 올라갈 때면 엄마는 내 튼 손을 보고 울고 나는 엄마 손에 든 옹이를 보고 울고 그랬죠.”
부모님이 바빠 김 대표는 물론 그녀의 두 여동생이자 현재 같이 일하는 지혜(27)씨나 애영(22)씨 역시 어린 시절에는 알뜰살뜰하게 돌봄을 받지 못했다. 뒷집 할머니가 아이들을 대신 돌봐 주어야만 했다고 한다.
“유치원 다닐 만한 나이였는데, 하루는 이가 너무 아픈 거예요. 엄마랑 아빠를 깨우는 데도 못 일어나는 거예요. 그래서 할매 집이 바로 뒤에 있었는데 할매를 찾아가 이 아프다 말하고 겨우 할매 등에 업혀 잠들었던 기억도 있어요.”
김미선(오른쪽) 지리산 피아골 식품영농조합법인 대표가 직원과 함께 전통 메주를 만들기 위해 삶은 콩을 통에 넣고 있다.
시골이나 산골이나 제 앞가림 할 줄 알면 그때부터 일꾼이 된다. 게다가 집안의 맏이라면 앞뒤 재볼 겨를도 없이 집안일을 돕는 게 우리들의 시골 정서였다. 그녀도 고향을 떠나기 전인 고등학생 시절까지 무던히도 집안일을 해내야만 했다. 그리고 대학생이 돼 고향을 떠났다. 시골에 사는 대다수의 부모들은 자식들만큼은 도시로 나가 성공한 삶을 살기를 바란다. 성공은 아니더라도 시골로 다시 돌아와 노동일 넘치는 삶을 영위하고 살기를 바라진 않을 터였다. 애완동물학과를 졸업했으니 마땅한 직업 찾기도 수월했을 터였다. 그런데 그녀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피아골에 김 대표와 같은 젊은이들이 얼마나 있느냐고 물었다.
“없어요. 저랑 제 동생 둘이랑 그리고 우리랑 같이 일하고 있는 막내 친구인 박은선이라는 친구가 전부예요.”
피아골에 청년이라곤 그렇게 달랑 4명이란다. 대학에서 무역을 전공한 지혜씨와 농업경제를 전공한 애영씨도 김 대표를 롤모델 삼아 고향으로 돌아왔다. 요즘 들어 많은 청년들이 고향으로 시골로 귀농이나 귀촌을 택한다지만 청춘들에게 시골은 아직도 낡고 발전 가능성 적고 답답하고 무료하며 미래를 보장할 수 없는 곳이라는 게 보편적인 인식이다.
“저는 다르게 생각해요.”
돌아온 고향은 바빴다. 외환위기 이후 이후 부모님께서 빚보증을 잘못 섰는데 이게 산더미처럼 불어나 빚은 여전했다. 김 대표는 엄마를 돕고 아버지를 도우며 식당과 민박을 꾸려 갔다. 그리고 짬을 내 전국의 식품 명인들을 찾아다녔다. 장아찌를 배우고 장 담그는 법을 배웠다. 불쑥 찾아와 음식을 배우겠다는 어린 여자를 명인들은 반겼다. 나중에 한 명인이 그런 말을 했다.
“이 년아, 네가 벌써 나를 뛰어넘었구나!”
김미선(오른쪽) 대표가 현장 체험차 방문한 전남 구례군 사회복지재단 직원들에게 떡 만드는 방법을 설명해 주고 있다.
# “하면 될 거라는 배짱과 손맛에 자신 있었기에”
김 대표가 만든 전통식품들의 맛을 본 손님들은 구입을 했고 판매가 이뤄지기 시작했다. 현재는 고로쇠수액을 이용한 전통장, 장아찌와 꿀, 나물 등을 판매해 고소득을 올리고 있다. 그러면서 지리산의 여건을 활용해 찾아오는 관광객에게 직접 맛보게 하고 생산 환경을 보여 주면서 신뢰를 쌓는 마케팅으로 꾸준히 매출을 올리고 있다. 부모님이 시작한 식당이 좋은 반응을 얻으면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고 한다. 자연이 좋아 지리산 피아골에 살고 싶었던 김 대표는 이곳에서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고민하다가 전통장 사업을 하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처음에 장류 사업을 진행하면서 크게 눈에 띄는 마케팅을 시작하기보다 찾아오는 관광객과 식당을 찾은 손님들의 입맛을 먼저 사로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식당을 거치지 않는 고객들의 발길을 잡을 수 있는 일종의 유인 장치로 카페를 차렸다.
# 고객에게 손편지·덤으로 채소… ‘감동 마케팅’
등산로에 마련된 카페는 1차적으로 음료를 마실 수 있지만 한쪽에 시식 코너가 마련돼 있어 마음껏 지리산피아골식품을 맛볼 수 있다. 냄새나지 않는 청국장까지 끓여서 시식할 수 있게 만들어 카페라기보단 시식장으로 많이 활용하고 있다. 지금은 연매출 5억원에 이르는 전통식품사업체를 운영하고 있다. 앞으로 김 대표의 꿈은 35살이 되기 전에 지역 청년 농부를 육성할 수 있는 교육장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 5억원의 매출로는 자금을 마련할 수 없다고 보고 연간 20억원의 매출을 올릴 수 있게 생산량을 늘려 나가고 있다. 청년들이 두려움 없이 시골로 돌아올 수 있기를 기원하며 세운 프로젝트였다.
그러다 보니 매출을 올릴 수 있도록 마케팅에 시간을 더 할애하고 있는데 그녀는 온라인 접촉보다는 오프라인 접촉에 더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택배 고객에게 손편지를 쓰거나 텃밭이나 주변에서 나는 계절 채소를 서비스로 동봉해 주는 마케팅 등으로 감동을 주고 있다. 지역 직거래장터나 백화점 행사 등을 자주 활용하는 것도 고객과 더 가까이 만나 제품을 알리고픈 생각에서다. 최대한 밖으로 제품을 가지고 나가 맛을 보여 주고 소비자의 반응을 직접 보면서 마케팅 전략을 수정해 나간다는 데 여느 기업의 최고경영자(CEO) 못지않은 마인드다.
# “내 물건 직접 가지고 나가서 직접 부딪쳐야”
“내 물건을 직접 가지고 나가서 직접 부딪치는 것이 가장 좋은 마케팅이에요. 그래야 판매율도 높고 재구매율도 높거든요. 이렇게 늘린 고객이 진짜 내 고객이 되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인터넷을 활용한 마케팅은 유지를 하지만 치중하지 않는 편이라고 한다. 요즘처럼 빠른 인터넷을 활용한 화려한 마케팅이 아닌 감성으로 다가가는 ‘느린 마케팅’이다. 한 번 맺은 인연을 소중하게 여겨 기복 없이 고객을 확보하면서 꾸준히 매출을 올리는 김 대표의 감동 마케팅이 오히려 이 시대에 필요한 마케팅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노력에 힘입어 얼마 전에는 농업중앙회와 계약을 맺어 그녀의 물건이 전국적으로 판매될 날을 기다리고 있다.
“하면 될 거라는 배짱하고 손맛에 정말 자신이 있었어요.” 그녀의 그런 배짱과 손맛이 없었다면 그런 꿈도 꾸지 않았을 것이다.
# “동네 어르신들께 문화적 혜택 드리고 싶어”
32가구가 사는 직전 마을. 김 대표는 마을 사람들의 강력한 추대를 받아 2012년 6월 직전 마을의 이장이 됐다. 전국 최연소 마을 이장이었다. 이후 임기 2년짜리 이장을 계속하고 있다. 이장이 된 그해 초에는 한 달에 한 두 차례 있는 이장님들의 회의에 참석하곤 했는데, ‘아버지 대신 왔느냐’는 게 보통의 인사였다. 이젠 아버지뻘 이장님들에게서 깍듯하게 ‘이장님’ 소리를 듣는 베테랑 이장이 됐다. 전등을 갈아 끼워 드리고, 편지를 부쳐 드리고, 반찬을 사다 드리고, 은행 심부름을 해드리고, TV를 고치러 이모네, 할머니네로 스쿠터를 몰고 다닌단다. 지난해는 군청의 예산을 얻어 내 마을의 가로등도 설치했다.
“어르신들마다 꽃꽂이, 영화 감상, 약초 같은 문화적 취향이 다 있더라고요. 이들에게 문화적 혜택을 주고 가난했던 삶을 치유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을이 관광지로 개발되면서 이웃 간에 경쟁이 심해지고, 크고 작은 갈등이 생겨났어요. 너무 안타까워 고향으로 돌아와 ‘마을을 바꿔 보자’는 마음으로 마을 이장직을 받아들인 거예요.”
배짱이 두둑하니 마을 이장직도 받아들였을 것이다. 어떤 삶이 성공한 삶이고, 어떤 삶이 행복한 삶인지 정답을 내릴 수는 없다. 요즘 능력이 없어 시골로 내려가는 게 아니냐고 걱정하던 그녀의 친구들이 어떡하면 시골로 내려가 그렇게 살 수 있느냐고 묻는다고 한다. 성공이나 행복의 잣대는 한 개인에게 있는 것이지 주변 환경으로 가늠하는 건 아닐 것이다. 손맛은 둘째치고 배짱만 있다면 고향으로 혹은 시골로 내려가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도시에만 미래가 있는 게 아니라 시골에도 미래는 무한하게 열려 있다는 걸 그녀는 물론 시골에서 터를 잡은 많은 청춘들이 그 사실을 증명해 내고 있다. 답답하고 각박한 도시를 떠나 시골로 내려가 ‘하이킥’ 한번 날려 보는 건 어떨까. 젊다는 게 한 밑천이라는 배짱으로 말이다.
■ 글쓴이 소설가 전민식 제8회 세계문학상 수상. 주요 작품으로 ‘개를 산책시키는 남자’, ‘불의 기억’, ‘13월’, ‘9일의 묘’ 등. / 서울신문 2016.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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