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 걷고 또 걷고 기차를 타고

[더,오래] 김순근의 간이역 (6) 가지 말았어야 했던 추억여행

푸레택 2022. 1. 23. 16:05

[더,오래] 김순근의 간이역(6) 가지 말았어야 했던 추억여행 (daum.net)

 

[더,오래] 김순근의 간이역(6) 가지 말았어야 했던 추억여행

추억여행은 젊었을 적 아름다운 추억을 찾아 떠나는 여행을 말한다. 나이 들수록 추억여행을 많이 떠올린다고 한다. 지나온 인생 여정을 뒤돌아보는 시간이 많아지다 보니 자연히 아련한 옛 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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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김순근의 간이역(6) 가지 말았어야 했던 추억여행

1980년대초 연인들의 데이트 명소 장흥유원지
당시 낭만적 모습 사라지고 어린이 시설만 잔뜩

추억여행은 젊었을 적 아름다운 추억을 찾아 떠나는 여행을 말한다. 나이 들수록 추억여행을 많이 떠올린다고 한다. 지나온 인생 여정을 뒤돌아보는 시간이 많아지다 보니 자연히 아련한 옛 추억에 대한 향수에 젖게 된다. 찾고자 하는 추억은 개인별도 다르겠지만 찾아야 할 추억과 찾지 말아야 할 추억도 있다. 너무나 변해버린 현실을 직면하는 순간 아름다운 추억 하나를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주말이면 유원지를 찾는 행랑객으로 붐볐던 2000년대 초반 장흥역. 지금은 낡은 간판이 운행 중단의 세월을 말해준다. [중앙포토]


50대 중반의 A 씨는 최근 경기도 장흥유원지(현, 장흥국민관광지)로 추억여행을 다녀왔다. 당시 장흥유원지는 초입에 서울교외선 장흥역이 있고 맑고 깨끗한 계곡에 인심 좋고 저렴한 민박도 많아 인근 일영과 함께 대학가 MT 장소로 인기를 끌었다. 지금 장흥역엔 열차가 정차하지 않지만, 당시 주말이면 장흥역은 젊은이들로 붐볐다.
1980년대 초 이곳에 장흥토탈미술관이 들어섰는데, 넓은 잔디밭에 다양한 조각품이 전시된 야외미술관이어서 단박에 청춘남녀의 데이트 명소로 떠올랐다. 특히 장작불 난로가 있던 너와집 카페는 연인들이 써놓은 방문기와 언약 등의 쪽지가 사방에 붙어있는 등 로맨틱한 분위기에다 마신 커피잔을 포장해주는 서비스로 유명했다. 당시 젊은이들 사이엔 이곳에서 가져온 커피잔 개수로 연애능력을 자랑했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었다.

그 시절 장흥토탈미술관 입구쪽의 카페. [중앙포토]

 

A 씨도 너와집 카페를 비롯해 장흥토탈미술관 곳곳에 20대 푸른 시절의 낭만이 깃들여 있다. 이런 이유로 그는 1993년까지 장흥토탈미술관을 자주 찾곤 했는데 이후 바쁜 세파 속에 발길을 끊었다. 그러나 25년이 훌쩍 지난 어느 날 불현듯 장흥이 가고 싶었다. 나이 들수록 추억이 그리워진다는데, A 씨 역시 그 옛날의 아름다운 기억들이 그리웠던 것. 기억 속 사람들은 없지만, 추억의 장소를 보면 당시로의 시간여행을 경험할 수 있을 것 같아 들뜬 마음에 홀로 장흥을 찾았다.

━ 유원지 입구서부터 ‘멘붕’

가는 길도 편해졌다. 네비게이션으로 검색하니 서울외곽순환도로 통일로 IC를 통하면 금방이다. 그러나 A 씨는 장흥 입구에 들어선 순간부터 ‘멘붕’에 빠졌다. 기억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들 때문이다. 입구에 몰라보게 많아진 건물과 숙박업소들, 도로 위를 높이 가로지르며 달리는 고가도로 등 당시와는 사뭇 달랐다.

가나아트파크. [사진 김순근]

 

유원지 입구를 지나면 도로 왼쪽에 있어야할 토탈미술관이 보이지 않아 주변을 두리번 거리며 올라가는데, 도로 오른쪽에 탤런트 임채무씨가 만든 놀이동산인 두리랜드는 그대로다. 두리랜드 50여 m 직전 왼쪽에 토탈미술관이 있었던 것 같은데, 다시 살펴봐도 미술관은 보이지않고 ‘가나아트파크’라는 간판이 길목을 지키고 있다. 오랜 세월속에 장흥토탈미술관이 사라진 것으로 생각하고, 그나마 옛모습을 간직한 석현계곡을 구경할겸 삼거리까지 올라갔다. 삼거리로 갈라지는 공간에 당시 통나무로 지은 독특한 외관의 레스토랑인 ‘예뫼골’이 있었다. 당시 들어가고 싶었지만 음료와 음식 가격이 만만찮아 그냥 치나쳤던 곳이다. 다행히 예뫼골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새로 들어선 건물과 야외조각상, 주차공간 등으로 인해 그 예뫼골인지 확인하는데 조금 시간이 걸렸을 뿐이다.

예뫼골. [사진 김순근]

 

다시 왔던 길로 되돌아가던 중 혹시나 하고 당시 미술관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가나아트파크’에 들러 물었더니 2006년에 장흥아트파크로 바뀐뒤 지금은 가나아트파크로 이름이 바뀌었단다. 도로에서 미술관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던 옛날과 달리 주변에 건물들이 많이 들어서 잘 보이지 않은 탓에 전혀 다른 곳으로 느껴졌던 것. 그 장소가 그대로 있다는 반가움에 입장권을 구입해 들어갔지만 기대는 이내 무너졌다. 문을 들어서는 순간부터 기억과 다른 생소한 모습들이었다. 야외에 조각상들이 전시되어 있고 야외공연장도 있었지만, 어린이 미술관·어린이체험관·B-BOB놀이터·목마 놀이터 등 주로 어린이들을 위한 전시공간이었다. 관람객도 연인들로 넘쳐나던 이전과 달리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이 대부분이었다.

가나아트파크. [사진 가나아트파크]

 

실망감에 발길을 돌리려던 참에 장작불이 있는 난로에 연인들의 사연이 주렁주렁 메달렸던 카페가 생각났다. 그곳엔 기억 속 모습과는 다소 다른 분위기의 카페가 자리하고 있다. A 씨는 카페 안으로 들어가려다가 발길을 멈췄다. 아름다운 추억들이 그 곳에 남아있는데, 분위기가 전혀 딴판으로 변한게 아닌지 걱정이 됐다. 더구나 지금은 연인 위주의 당시와 달리 가족단위 고객들이 많으니…

가나아트파크. [사진 가나아트파크]

 

A 씨는 결국 그곳 만은 기억 속 당시 모습 그대로 남겨놓고 싶어 돌아섰다. 나오면서 매표소 안내인에게 물어보니 겉모습은 비슷하지만 내부가 현대식으로 바뀌었는데, A 씨처럼 옛 추억을 더듬어 찾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과연 그들은 달라진 모습에도 만족했을까.

━ 피천득의 인연

장흥을 빠져나오면서 문득 2007년 작고한 피천득 시인의 ‘인연’ 한 구절이 떠올랐다. “그리워하면서도 만나지 못하고, 일생을 그리워하면서도 못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다.”

2007년 작고한 피천득 시인

 

17세 소년 피천득은 소학교 일학년에 다니던 아사코를 처음 만난후 평생을 그리워하는 인연이 됐다. 첫 만남을 가진뒤 10여년후 영문과 3학년이던 아사코를 만나고 또 10년후 결혼한 아사코를 만난다. 첫 만남후 소학교 여학생만 보면 아사코가 생각났고, 두 번째 만남후에는 연두색 우산만 보면 당시 아사코가 가지고 나왔던 우산을 떠올릴 정도로 새로운 그리움이 생기는 추억이 됐으나 세 번째 만남 후에는 만남을 후회한다. 미국계 일본인 2세와 결혼한 아사코를 만난뒤 마음속에 간직해온 아름다운 추억에 손상이 온듯하다.

피천득씨의 수필 『인연』의 주인공 아사코의 중학교 시절 모습(하이라트 부분).네모 안은 아사코의 사진을 본 피씨의 표정을 잡은 장면이다. [중앙포토]

 

A 씨는 “내 젊은 기억 속의 그리운 장면중 하나인 옛 장흥토탈미술관. 찾아가지 말았어야 했다는 후회가 남는다”며 “그곳에 다녀온후 기억 속에 또렷이 남아있던 낭만적인 추억들이 현재 모습과 오버랩되면서 흐릿해지고 있다”고 후회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추억을 쌓고 때론 그 추억을 떠올리며 옛 장소를 찾곤 한다. 어떤 이는 피천득 시인처럼 또다른 추억을 안고 오는 ‘두 번째 만남’이 되기도 하지만 또다른 이들은 ‘세번째 만남’처럼 후회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지금 추억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과연 몇 번째 만남에 해당될지 한번쯤 따져봐야 하지 않을까. 김순근 여행작가 중앙일보 2019.09.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