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적 / 강은교
그건 참 기적이야
산에게 기슭이 있다는 건
기슭에 오솔길이 있다는 건
전쟁통에도 나의 집이 무너지지 않았다는 건
중병에도 나의 피는 결코 마르지 않았으며
햇빛은 나의 창을 끝내 떠나지 않았다는 건
내가 사랑하니
당신의 입술이 봄날처럼 열린다는 건
오늘 아침에도 나는 일어났다, 기적처럼
- 시집 『네가 떠난 후에 너를 얻었다』 (서정시학, 2011)
[감상]
강은교 시인은 스물일곱의 나이에 뇌를 여는 수술을 받고 이후 줄곧 신경안정제를 달고 살았다. 그 약들은 그의 일용할 양식이 되었다. 그 무렵 생후 7개월 된 아이도 잃었다. 그러고서 지금껏 시를 쓰고 강의를 하고 논문도 써왔다. 시인은 이렇게 살아 움직이며 두뇌활동을 하는 것을 스스로 기적이라고 했다. 그리고 “나는 초월한다는 것이 현재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보다 깊숙이 뿌리 닿는 것임을 이해하기 시작했다”고 고백한다. 또 “삶의 깊은 고통 속에서도 자기 밭에 홀로 씨를 뿌리며 땀으로 꿈을 적시는 자는 아름답다”고 말한다.
무심하게 살아가다 보면 삶의 소중함을 의식하지 못하고 잊기 쉽다. 삶이 더없이 소중하고 큰 선물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그래서 생일선물에는 고마워하면서도 삶 자체는 고마워할 줄 모른다. 흘러가는 대로 살기도 하고 하찮은 일들에 매달려 하루하루를 보내기도 한다. 하지만 큰 병을 앓다가 다시 일어난 사람들은 그때서야 아침에 눈을 떠서 붉은 해를 볼 수 있다는 것이, 한 끼니의 식사를 위해 젓가락을 들 수 있는 힘을 가졌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겸손해지면서 그 위대함을 깨닫는다.
일찍이 임제 선사는 '기적이란 물 위를 걷는 게 아니라 땅 위를 걷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날마다 땅 위를 걷는 기적 속에 살아가지만 자각하지 못할 뿐이다. 그러다가 더는 걸을 수 없는 지경에서야 비로소 깨달음을 얻는다. ‘중병에도 나의 피는 결코 마르지 않았으며. 햇빛은 나의 창을 끝내 떠나지 않았다는 건’ 기적이다.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 깨어 있는 우리 모두는 기적이다. 엄청난 기적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창밖 저 산 다섯 개의 능선을 바라볼 수 있는 것도, 고난과 상처와 별별 희한한 사건사고들 가운데서도 집이 무너지지 않은 것도, 내가 쓰러지지 않은 것도 기적이다.
현재의 삶이 곧 기적이다. 우리가 지금 이 순간에 살아있고, 땅 위에서 발걸음을 옮기고 있음도 기적이다. 손을 한번 쓱 쓰다듬어서 앉은뱅이가 일어서고, 눈먼 자에게 앞을 보게 하고, 없던 양식이 한 순간 손에 쥐어져야만 기적은 아닌 것이다. 지금의 우리는 이미 크나큰 기적의 은혜 속에 살고 있다. 앞을 못 보는 사람에겐 단 한순간이라도 볼 수 있는 시간을 얻는 게 기적이라면 우리는 날마다 그 기적을 누리는 셈이다. 오직 아침에 눈을 뜨기만 하면 되는 그 사실이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랴.
긍정의 힘으로 보면 모두가 참 기적이다. 그러기에 당신과 내가 우리 모두 여기 함께 있다는 사실은 정말 기적이다. 응급실로 실려 가서 세 차례의 수술을 받고도 침몰하지 않고 지금 눈을 껌벅이고 계시는 내 어머니의 깨어있음도 기적이다. 많은 사람들의 응원과 기도의 힘으로 더 많은 기적의 날들을 살아가시리라. 그 기들이 모이고 쌓여서 어머니뿐 아니라 이 병실에 누워있는 모든 분들께도 기운의 원천이 되리라. 햇빛은 그들의 창을 끝내 떠나지 않을 것이며 사랑하노니 그 기가 쌓일 때 기적은 일어날 것이다. 기적처럼 그들의 ‘입술이 봄날처럼 열’리리라. (글=권순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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