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작수필] '새벽종을 치면서' 권정생(權正生) (2021.11.24)

푸레택 2021. 11. 24. 12:45

ㅣ 일직교회

■ 새벽종을 치면서 / 권정생(權正生)

겨울의 새벽하늘은 참 아름답다. 종을 치면서 나는 줄곧 이 아름다운 하늘을 쳐다보고 있다. 성에가 끼고 꼬장꼬장 얼어버린 종 줄을 잡은 손이 무척 시리지만, 나는 장갑을 끼지 않는다. 가장 효과적으로 종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은 역시 맨손으로 종 줄을 잡고 쳐야만 서툴지 않게 조절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한 번 종 줄을 잡아당기는 데 정성이 가기 마련이다.

깨끗한 하늘에 수없이 빛나는 별들과 종소리가 한데 어울려 더없이 성스럽게 우주의 구석구석까지 아름다운 음악으로 채워지는 순간이다.

지난 한가윗날, 어릴 적에 도회지로 이사를 간 종희라는 아이가 오랜만에 고향에 다니러 왔다. 대학 2학년의 어엿한 숙녀가 된 종희는 내게 물었다.

“집사님은 여기 계신 지 몇 년이나 되셨어요?”

“벌써 10년이 넘었구나.”

내 대답에 종희는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저는 한 30년은 됐을 거라 생각했어요. 집사님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여기 계신 것만 같아요.”

종희 뿐만 아니라 어릴 때 주일학교에 다니던 아이들은 가까이 있거나 멀리 갔거나 한결같이 이 산골 예배당 문간 조용한 방에 혼자 사는 종지기인 나를 옛날얘기 속 주인공처럼 착각하고 있다.

내 생활이 남들과 달라서일까? 아니면 고된 세상살이에 부대끼며 세월의 흐름이 그만큼 지루했던 탓일까? 어쨌든 나는 12월이 되면 새벽종을 치면서 많은 얼굴을 떠올린다.

외로워지면 누군가 그리워지고, 그리워지면 밉던 얼굴도 보고 싶어지고, 보지 못하는 설움 때문에 가슴이 아파진다. 사방이 아직 어둡고 적막한 이 새벽에 느끼는 고독은 형언하기 어렵도록 절실한 것이다.

우리 교회에서 가장 연세가 많으신 일흔 살의 장로님은, 추운 새벽에 종을 치는 나를 생각해서 따뜻한 이불 속에 그냥 누워 있을 수 없어 기도하러 나오신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종을 치는 나는 이런 것과는 다른 무엇을 염원한다. 그것은 너무 추상적이고 황당한 염원인지는 모르지만 새벽하늘에 반짝이는 별의 수만큼 나의 바람은 한없이 많다. 종을 한 번 잡아당기면서 하느님께 기도 드리듯 쏟아지는 나의 바람들.

불치병을 가진 아랫마을 그 애의 건강을, 이 새벽에도 혼자 외롭게 주무시는 핏골산 밑 할머니의 앞날을, 통일이 와야만 할아버지를 뵈올 수 있다는 윗마을 승국이 형제의 소원을, 그러고는 어서어서 예수님이 오시는 그날이 와서, 전쟁이 없어지고, 주림이 없어지고, 슬픔과 괴로움이 없어지고, 사막에도 샘이 솟고, 무서운 사자와 어린이가 함께 뒹굴고, 독사의 굴에 어린이가 손을 넣어 장난치고, 다시는 헤어짐도 죽음도 없는 그런 나라가 오기를…….

이런 것들을 끝도 없이 쏟아놓으며 예순 번이 넘도록 치던 새벽종을 그친다. 이때쯤 뒷산 솔밭 속에서 곤히 자던 다람쥐랑 산토끼가 깨어나 오줌을 쭈르르 누고는 다시 쭈그리고 잠들게다.

- 《샘터》 (1980) 中에서

권정생(權正生, 1937~2007): 일본 도쿄의 빈민가에서 태어났다. 광복 직후인 1946년 외가가 있는 경상북도 청송으로 귀국했지만 가난 때문에 가족들과 헤어져 어려서부터 나무장수와 고구마장수, 담배장수, 가게 점원 등으로 힘겹게 생활하였다. 객지를 떠돌면서 결핵과 늑막염 등의 병을 얻어 평생 병고에 시달렸으며, 1967년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조탑동에 정착하여 그 마을의 교회 문간방에서 살며 종지기가 되었다.

1969년 단편동화 《강아지 똥》을 발표하여 월간 《기독교교육》의 제1회 아동문학상을 받으며 동화작가로서의 삶을 시작하였다. 197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화부문에 《무명저고리와 엄마》가 당선되었고, 1975년 제1회 한국아동문학상을 받았다. 1984년부터 교회 뒤편의 빌뱅이언덕 밑에 작은 흙집을 짓고 혼자 살면서 작품 생활을 하였다.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뒤에도 검소하게 생활하다가 2007년 세상을 떠났다. 자신이 쓴 모든 책은 주로 어린이들이 사서 읽은 것이니 거기서 나오는 인세를 어린이에게 되돌려주는 것이 마땅하다는 유언을 남겼으며, 2009년 3월 그의 유산과 인세를 기금으로 하여 남북한과 분쟁지역 어린이 등을 돕기 위한 권정생어린이문화재단이 설립되었다.

그의 삶과 작품은 예수 스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한다. 자연과 생명, 어린이, 이웃, 북녘 형제에 대한 사랑을 주제로 깜둥바가지, 벙어리, 바보, 거지, 장애인, 외로운 노인, 시궁창에 떨어져 썩어가는 똘배, 강아지 똥 등 그가 그려내는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힘없고 약하다. 그러나 그들은 나를 죽여 남을 살려냄으로써 결국 자신이 영원히 사는 그리스도적인 삶을 살아간다.

저서로는 동화에 《강아지 똥》 《사과나무밭 달님》 《하느님의 눈물》 《몽실언니》 《점득이네》 《밥데기 죽데기》 《하느님이 우리 옆집에 살고 있네요》 《한티재하늘》 《도토리 예배당 종지기 아저씨》 《무명저고리와 엄마》 《또야 너구리가 기운 바지를 입었어요》 《깜둥바가지 아줌마》 등과 시집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는》, 수필집 《오물덩이처럼 뒹굴면서》 《우리들의 하느님》 등이 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두산백과》

/ 2021.11.24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