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초(芭蕉) / 이태준(李泰俊)
작년 봄에 이웃에서 파초 한 그루를 사 왔다. 얻어온 것도 두어 뿌리 있었지만 모두 어미뿌리에서 새로 찢어낸 것들로 앉아서나 들여다볼 만한 키들이요 ‘요게 언제 자라서 키 큰 내가 들어선 만치 그늘이 지나!’ 생각할 때는 적이 한심하였다.
그래 지나다닐 때마다 눈을 빼앗기던 이웃집 큰 파초를 그예 사 오고야 만 것이다. 워낙 크기도 했지만 파초는 소 선지가 제일 좋은 거름이란 말을 듣고 선지는 물론이고 생선 씻은 물, 깻묵물 같은 것을 틈틈이 주었더니 작년 당년으로 성북동에선 제일 큰 파초가 되었고 올 봄에는 새끼를 다섯이나 뜯어내었다. 그런 것이 올 여름에도 그냥 그 기운으로 당차게 자라 지금은 아마 제일 높은 가지는 열두 자도 훨씬 더 넘을 만치 지붕과 함께 솟아서 퍼런 공중에 드리웠다.
지나는 사람마다 “이렇게 큰 파초는 처음 봤군!” 하고 우러러보는 것이다. 나는 그 밑에 의자를 놓고 가끔 남국의 정조(情調)를 명상한다.
파초는 언제 보아도 좋은 화초다. 폭염 아래서도 그의 푸르고 싱그러운 그늘은, 눈을 씻어줌이 물보다 더 서늘한 것이며 비오는 날 다른 화초들은 입을 다문 듯 우울할 때 파초만은 은은히 빗방울을 퉁기어 주렴(珠簾) 안에 누었으되 듣는 이의 마음에까지 비를 뿌리고도 남는다. 가슴에 비가 뿌리되 옷은 젖지 않는 그 서늘함, 파초를 가꾸는 이 비를 기다림이 여기 있을 것이다.
오늘 앞집 사람이 일찍 찾아와 보자 하였다. 나가니
“거, 저 파초 파십시오.” 한다.
“팔다니요?”
“저거 이젠 팔아버리서야 합니다. 저렇게 꽃이 나온 건 다 큰 표구요, 내년엔 영락없이 죽습니다. 그건 제가 많이 당해본 걸 입쇼.” 한다.
“죽을 때 죽더라도 보는 날까진 봐야지 않소?”
“그까짓 인제 둬 달 더 보자구 그냥 두세요? 지금 팔면 파초가 세가 나 저렇게 큰 것 오 원도 더 받습니다. … 누가 마침 큰 걸 하나 구한다죠. 그까짓 슬쩍 팔아버리시죠.”
생각하면 고마운 일이다. 이왕 죽을 것을 가지고 돈이라도 한 오 원 만들어 쓰라는 말이다.
그러나 나는 마음이 얼른 쏠리지 않는다.
“그까짓 거 팔아 뭘 하우.”
“아 오 원쯤 받으셔서 미닫이에 비 뿌리지 않게 챙이나 해 다시죠.”
그는 내가 서재를 짓고 챙을 해 달지 않는다고 자기 일처럼 성화하던 사람이다.
나는 챙을 하면 파초에 비 맞는 소리가 안 들린다고 몇 번 설명하였으나 그는 종시 객쩍은 소리로밖에 안 듣는 모양이었다.
그는 오늘 오후에도 다시 한 번 와서,
“거 지금 좋은 작자가 있는뎁쇼……” 하고 입맛을 다시었다.
정말 파초가 꽃을 피면 열대지방과 달라 한 번 말랐다가는 다시 소생하지 못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마당에서, 아니 내 방 미닫이 앞에서 나와 두 여름을 났고 이제 그 발육이 절정에 올라 꽃이 핀 것이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 그가 한 번 꽃을 피웠으니 죽은들 어떠리! 하물며 한마당 수북하게 새순이 솟아오름에랴!
소를 길러 일을 시키고 늙으면 팔고 사간 사람이 잡으면 그 고기를 사다 먹고 하는 우리의 습관이라 이제 죽을 운명엣 파초니 오 원이라도 받고 팔아준다는 사람이 그 혼자 드러나게 모진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무심코 바람에 너울거리는 파초를 보고 그 눈으로 그 사람의 눈을 볼 때 나는 내 눈이 뜨거웠다.
“어서 가슈. 그리구 올가을엔 움이나 작년보다 더 깊숙하게 파주슈.”
“참 딱하십니다.”
그는 입맛을 다시며 돌아갔다.
- 이태준 문학전집 《無序錄》 (1941) 中에서
/ 2021.11.17(수)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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