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작수필] '어느 바다의 少年期' 김열규(金烈圭) (2021.11.17)

푸레택 2021. 11. 17. 19:31

■ 어느 바다의 少年期 / 김열규(金烈圭)

소년은 구름의 행방이 궁금했다.

바다 위를 건너다가 마침내 수평선에 다다른 구름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설핏하게 기울며 하늘이 바다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간 어름. 바다에 하늘이 맞닿아 이루어진 가름. 그 세상의 끝에서 구름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그렁저렁한 생각에 소년은 어슴 노을이 짙어가는 바다 곁 언덕을 지키고 앉았었다.

저 바다가 다하는 곳에서 하늘 끝을 물깃 삼아 파도는 철썩이고 있을까. 아니면 거기 커다란 낭떠러지가 있어 바다는 폭포처럼 쏟아지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어린 환상은 무서운 영상을 좋아하지 않았다.

거대한 유리항아리 같은 하늘 속에 바닷물이 고여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마음 편했다. 그러자니 구름은 바다에서 잠기는 수밖에 없었다. 기울어진 하늘 따라 구름은 바다 속으로 미끄러져들 거라고 생각했다. 솜처럼 물에 풀린 구름.

해파리처럼 흐늘흐늘 물살에 떠도는 구름의 환영은 즐거웠다. 너울거리며 수심 따라 가라앉는 구름 가운데는 피었다 지는 허어연 연꽃송이도 있었다.

물고기들은 새 놀이터에서 어쩔 줄을 몰랐다. 연하고 녹진하게 물에 부푼 구름 들은 그들이 묻혀서 뒹굴어도 좋았고, 숨어서 웅크려도 좋았다. 조각지고 가닥이 난 구름들이 거품을 더불어 피면 물고기들 — 술뱅이 · 놀랭이 · 볼락 · 감성이, 그런 이쁜 이름의 작은 물고기들은 손뼉을 쳤다.

파래 · 다시마 · 미역 · 가사리 · 잴피에 청각, 갈매와 보라, 퍼렁과 누렁빛, 넌출넌출 우거진 섶 그늘, 갖가지 바다풀의 덩굴이 융숭하게 설레고, 사이사이 구름조각들이 나무숲에 내리는 눈처럼 너울거리면, 이 기묘한 하늘과 바다, 구름과 물의 조화에 물고기들은 소스라쳤다. 어둔 물속이라 은비늘은 오히려 교교(皎皎)했다.

어슴 노을이 짙어지는 만큼 소년의 환상은 짙어가곤 했다.

그리고 그는 언젠가는 구름이 떠도는 그 물속에 잠겨 보리라고 생각했다. 언젠가는 저도 물속에서 구름처럼 풀리고 물처럼 풀리리라고 다짐을 두었다.

소년은 바다를 좋아했다. 물살 위에 네 활개를 펴고 눕는 것이 요 위에 발 뻗고 눕는 것보다 한결 편안했었다. 그는 그만큼 바다를 좋아했다.

소년은 수영을 배우고 자맥질을 익혔을 때, 그리고 꽤 오랜 나날을 물속에서 버둥대고 곤두박이고 하다가 마침내 그 엄벙덤벙한 물놀이의 절정에 다다른 적이 있었다. 그것은 제 몸이 물고기처럼 느껴지던 그 아슴한 고비를 넘어서서 드디어 물처럼 아주 물처럼 느껴지던 순간이었다. 거기 비하면 한 마장은 더 되게, 반 십리는 실하게 파도를 넘나든 것은 자랑이 못되었다.

물살에 등을 대고 가만히 누워 있을 때, 그리하여 등줄기를 간질이는 파도의 가벼운 진동에 절로 눈이 감겨졌을 때, 아니면 자맥질 끝에 바윗부리를 잡고 물 밑에 엎드렸을 때, 그리하여 화려와 우아의 극을 이룬 물고기들의 행렬을 지켜보고 있을 때, 그러한 어느 한때, 제 몸이 있고서야 그렇게 가벼울 수가 없었다.

몸뚱아리는 온데간데없고 물살이 되어 물살과 더불어 출렁이고 있는 자신을 느낄 뿐이었다. 피부를 꼬집어도 다만 물살이 잡힐 뿐, 팔다리를 놀려보아도 사지를 움츠렸다 펴보아도 감겨드는 것, 휘어드는 것은 물살뿐이었다. 몸뚱아리가 있던 자리에 새삼스럽게 파동을 일으키는 물살이 있을 뿐이었다.

소년의 몸은 물에 풀리고 아까까지 그가 있던 곳에는 둘레의 물빛과 가를 수 없는 한 덩치의 물빛이 고여 있었다.

이제 물고기들은 제 속에서 헤엄치는 것이었다. 술뱅이의 무지개무늬가 제 속에서 얼룩거렸고, 잴피 갈매빛 가닥이 제 안에서 넌출거렸다.

소년은 돌부리를 잡았던 손을 들어서는 고무줄을 꿰어서 어깨에 메고 있던 작은 작살을 풀어놓았다.

그것은 작은 바다사냥꾼에 대한 결별. 바다 속 소영웅(小英雄)이 누리던 모험에 대한 하직이었으나 소년은 후회하지 않았다. 어린 나날, 여름의 어린 나날을 위엄과 영광으로 물들이던 상징을 묵은 세월의 껍질처럼 벗어던질 수 있었다.

작살에 찍혀서 푸드득거리던 감성돔의 은비늘, 그 작렬하던 은린(銀鱗)의 섬광 속을 붉게 물들이던 선혈. 터지는 순간의 꽃불 같았던 선홍빛이 햇무리처럼 퍼졌다가 차츰 실오리같이 연한 빛으로 아물거리면 물고기의 지느러미가 무섭게 곤두섰다. 그것은 정말 황홀한 탐미의 순간. 소년이 바다와 함께 창조하던 순수 추상의 아름다움에도 기꺼이 이별을 고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스스로 물속에 물처럼 풀린 순간, 나머지 모든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혼자서 치른 신비의 제의(祭儀). 잴피 · 가사리 · 술뱅이 · 뽈락 · 다시마 · 미역 · 놀랭이 · 감성돔, 다들 어울려 노닐고 휘드러져 넌출대는 속에서 혼자서 가진 성전(盛典). 그것은 바다만큼 웅숭깊고 바다처럼 아득히 묘망(渺茫)한 것. 그리고 소년이 엿본 심해어(深海魚)의 깊은 꿈속에 영원히 잠겨 있어야 할 비의(秘儀)였다.

그런 일이 있고 난 뒤부터였다. 잠이 깊을 때 소년이 심해어의 꿈을 꾸게 된 것은... 심해어에 대한 꿈이 아닌 심해어가 가질 꿈으로 꾸는 꿈. 꿈이 깊을 때 소년은 늘 심해어의 꿈을 꾸었다. 그것은 아주 이상한 일이었다.

온 바다의 부피가 응어리져서 작은 뭉치가 된 심해어, 그 육중한 물고기에 물에 풀린 가벼운 목숨의 꿈을 붙인다는 것은 아주 이상한 일이었다.

물살이 되는 물결로 화했다가, 넘실대고 출렁이다가, 어느 때는 일렁이고 회돌다가 드디어 바다 속속들이 퍼지고 급기야 바다 하나만큼 고이게 될 것이기에, 그 펑퍼지는 힘, 그 부푸는 힘이 하도 벅차서 한 점 야무지게 맺히고 박힐 힘이 있어야겠다고, 그래서 퍼지고 부푼다 해도 옹골차게 펑퍼져야겠다고 노상 눈감은 심해어의 꿈을 지녀야 했던 것일까. 놓치면 그만일 목숨처럼……

바다 밑 그 짙은 어둠에 저려서 삭아지기커녕 오히려 어둠을 모아 광채를 빚는 심해어, 칠흑의 어둠을 영글이어 밝힌 심해어의 빛 앞에서야 비로소 제몫만큼의 빛을 누린 혼자만의 성전(盛典)이라서 소년은 심해어의 꿈을 간직한 것이리라.

구름이 풀린 바다에 스스로도 풀린, 그 단 한 번의 꿈을 심해어의 꿈에 깊이 묻었던 바다의 소년은 그때가 오늘같이 삼십여 년의 세월 두고 어슴 노을이 비낀 바다 곁을 지키고 있다. 그 소년은 언제나 심해어만한 크기의 빛, 그만한 광채의 빛이 된다는 것을, 그가 바다 멀리 구름을 바랄 동안은 그것이 틀림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 김열규((金烈圭, 1932~2013): 경남 고성 출생. 소설가, 전 대학 교수. 서울대학교 국문학, 민속학 전공, 서강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 미국 하버드대학교 옌칭연구소 객원교수. 서강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조선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1963). 제2회 수필문학상. 저서 《한국인의 돈》, 《기호로 읽는 한국 문화》, 《한국의 신화》, 《한용운 연구》, 《한국인의 죽음과 삶》, 《우리 민속문학의 이해》, 《한국문학사》, 《문화의 자장》 등.

/ 2021.11.17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