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생님의 밥그릇 / 이청준
37년 전의 반 담임 선생님을 모신 저녁 회식 자리는 이 날의 주빈이신 노진 선생님의 옛 기벽에 대한 추억으로 처음엔 그 분위기가 그저 유쾌하기만 하였다.
노진 선생님은 그러니까 50년대 초중반 전란의 혼란과 궁핍 속에 어렵사리 중학생모를 쓰게 된 우리 중학교의 1학년 3반 담임 선생님이셨다. 그런데 중학교 초년 시절 그 남녘 도시의 노진 선생님은, 새 교풍과 학과목, 근엄한 표정의 선생님들 앞에 어딘지 기가 조금씩 움츠러든 반 아이들, 특히 이곳저곳 벽지 시골에서 올라와 낯선 도회살이를 갓 시작한 심약한 지방 출신 아이들을 또래 친구처럼 즐겁게 잘 보살펴 주신 분이었다. 한 예로, 방과 후에 뒤에 남아 빈 교실을 정리해야 하는 청소 당번을 몹시 싫어한 우리들에게 선생님은 그날그날 종례시간에 갑작스런 벌칙을 마련하여 거기에 해당하는 아이들로 하여금 그 날의 청소 인원을 충당하곤 하시는 식이었다.
“오늘 아침 운동장 조회 때 똑바로 줄서지 않았다가 나한테 호명 당한 일곱 명 일어서 봐…… 너희가 오늘 청소 당번이다.”
“오늘 체육 시간에 체육복 안 입고 나간 사람 ○명 있었다는데, 누구누군가……너희들 오늘 무엇을 해야 하는 녀석들인 줄 알고 있겠지?”
항상 그런 식이셨다. 어떤 땐 갑자기 책가방 속을 검사하여 놀이용 구슬을 가지고 다니는 아이들을 골라내시기도 하였고, 어떤 땐 저고리 단추나 이름표가 조금 비뚤어진 아이들을 억울하게 골탕 먹이시기도 하였다. 심지어는 선생님이 종례 들어오시는 걸 모르고 미처 자리에 앉지 못한 아이들의 이름이 줄줄이 불리게 될 때도 있었고, 그게 그 날의 청소 당번이 될 줄 알고 미리 선수 쳐
“너희들 오늘 청소 당번!”
하고 말했다가 오히려 선생님의 ‘교편을 모독한 죄’나 ‘남의 불행을 악용하려는 죄’로 먼저 걸린 아이들을 대신해 엉뚱하게 청소 당번을 하게 되는 고역을 떠안게 되는 수도 있었다. 또 책가방 속에 만화책을 숨겼다가 들통이 난 아이는 그 허물로 공부를 소홀히 한 죄, 중학생의 품의를 떨어뜨린 죄, 선생님의 주의를 어긴 죄 그리고 선생님을 속이려 한 죄에다 자신의 죄목을 헤아려 보라고 했을 때 ‘선생님의 비상한 눈치와 비행 탐지력을 알아보지 못한 죄’를 빠뜨린 허물로 ‘자신이 반성해야 할 죄의 가짓수도 다 알지 못한 죄’까지 더하여 일주일 동안 연속 벌 청소를 선고받은 아이의 경우까지 있었다.
그러나 반 아이들은 언제 어디서 어떤 벌칙으로 그 날의 청소 당번이 정해지게 될지 몰라 선생님 앞에선 늘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긴장이나 원망을 부를 리는 없었다. 그렇게 떠맡게 된 청소 당번이 그닥 억울하거나 짜증스러울 수도 없었다. 그것은 일종의 즐거운 유희나 게임 같은 것이었고, 우리들의 첫 학교생활도 그만큼 부드러운 안정을 얻어 갔다.
그런데 어느 날 오후 그 노진 선생님이 그간 정년퇴직을 하고 지내시다 이번에 며칠 간 서울에 머무르고 계시다는 한 옛 반 친구의 전화 통문이었다. 거기다 전에도 가끔 찾아뵌 친구들이 있긴 하지만, 이번 기회에 옛 반우들이 함께 선생님을 모셔 보자는 의견에 따라, 서울에 머무르고 있는 옛 제자 7, 8명이 모처럼 선생님과 함께 하게 된 자리가 이 날의 회식 자리였다. 그러니까 그 시절 그런저런 반 관리나 아이들 지도법을 무슨 싱거운 기벽쯤으로 말하기는 뭣하지만, 어쨌거나 그 같은 선생님에 대한 추억들로 이 날의 회식 자리는 처음엔 그 분위기가 썩 부드럽고 즐거운 편이었다. 그런 류의 모임 자리가 대개는 그런 식이듯 어딘지 좀 싱겁고 의례적이기까지 한 느낌마저 없지 않았을 정도였다.
그런데 몇 순배 술잔이 비워지고 주식사가 나왔을 때부터는 그런 분위기가 갑자기 달라지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그 때 상을 보아 주고 나가는 심부름꾼 아이에게 빈 그릇 하나를 더 부탁하여 당신의 밥을 미리 반쯤이나 덜어 내고 식사를 하셨는데, 그것을 보고 한 친구가 무심히 아는 체를 하고 나선 것이 그 첫 사단이었다.
“근력이 썩 좋아 보이시즌 못한 편이신데 진지라도 좀 많이 드시지 않으시구요.”
“전에도 선생님께선 늘 수저를 드시기 전에 먼저 진지를 많이 덜어 내시던데 혹시 소식 요법이라도 계속하고 계신 거 아니신지요?”
먼저 친구에 이어 그 동안 몇 차례 선생님을 찾아뵌 적이 있었다던 다른 한 친구까지 뒷말을 거들고 나서는 소리에, 선생님은 처음엔 별로 대수롭잖은 일처럼 가벼운 웃음기 속에 대답을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가셨다.
“아니 이 나이에 무슨 건강 요법은…… 어쩌다 몸에 익어진 내 젊었던 적부터의 버릇이랄까……”
그런데 그 다음에 선생님의 표정이나 말씀이 좀 심상치가 않아 보이셨다.
“문상훈 군…… 내 자네한텐 아직도 할 말이 없네. 그래, 자넨 그동안 큰 어려움 없이 잘 지내왔던가?”
제자들의 물음에 왠지 대답을 흐리고 계신 듯싶던 그 선생님의 눈길이 무심결에 문상훈이라는 한 운수회사 봉직의 친구에게로 흐르시더니, 무언지 마음속에 혼자 묻어온 생각이 있으신 듯 그에게 조용히 묻고 계셨다. 그 선생님의 어조나 표정 속에 분명 이 때까지와는 유가 다른 어떤 그윽하면서도 새삼스런 감회의 빛이 어리고 있었다. 더욱이 일견 범연스레 보일 수 있는 그 선생님의 물음 앞에 문상훈도 역시 이상하게 얼굴색이 붉어지며 다른 때의 그답지 않게 목소리가 숙연해지고 있었다.
“예, 선생님. 저야말로 그 동안 선생님의 은덕으로 자신을 이만큼이나마 이끌어온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전 선생님께서 그 때 하신 말씀을 오늘까지 이렇게 잊지 않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얼핏 들으면 무슨 선문답 같은 주고받음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내 그 곡절을 알게 됐다. 동시에 그 옛 시절 선생님의 또 다른 유희성 단속 놀음 한 가지를 떠올리고들 있었다. 다름 아니라, 그 시절 선생님은 우리들의 점심 도시락 단속에 유난히 더 열을 올리고 계셨다. 거의 종례시간마다 도시락 통을 검사하여 점심을 거른 아이들에게 예의 벌 청소 일을 떠맡겨 버리곤 하셨다.
선생님은 장난기를 띠시며 벌 청소감을 찾아 내셨지만, 그 어려운 시절 자취방을 얻어 지내는 지방 출신 아이들이나 집안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에게는 그것이 여간 힘들고 거북한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어린 시절의 건강을 보살펴 주시려는 선생님의 뜻은 충분히 이해를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점심을 거르고 지내야 하는 몇몇 아이들에겐 그 서글픈 허기 속에 벌 청소까지 안겨 주는 선생님의 처사가 더없이 비정하고 원망스럽기까지 하였다.
그런데 그 선생님의 잦은 도시락통 검사 행사가 언제부턴가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게 되고 말았다. 어느 날 그 행사 중에 일어난 한 무참스런 사건을 계기로 해서였다. 그 날도 선생님은 종례 시간에 예의 벌 청소꾼을 모으기 위해 점심을 거른 아이들을 색출해 내고 계시던 중이었다.
“선생님, 문상훈은 도시락을 싸 오지 않았으면서도 일어서지 않고 있어요”
종례 시간의 들뜬 분위기에다 벌 청소를 할 아이들의 수가 모자라는 것을 보고 그 상훈의 바로 뒤쪽 자리에 앉은 녀석이 제 앞 친구를 장난삼아 고해바치고 나섰다.
그런 고자질에 상훈은 물론 제 책상 위에 꺼내 놓은 도시락 통을 증거로 얼굴을 붉혀가며 마구 화를 내었다. 그러자 기왕 말을 꺼낸 뒷자리에 앉은 고발자도 지지 않고 가차 없는 증언을 계속했다.
“도시락은 늘 가지고 다니지만, 난 네가 한 번도 점심시간에 도시락을 꺼내 먹는 걸 못 봤다. 넌 종례 시간에만 도시락을 내놓고 벌 청소를 빠지더라……”
드디어 선생님이 미심쩍은 얼굴로 그 사실을 확인하러 상훈에게 다가가신 건 그때로선 매우 당연한 절차였다. 그리고 도시락통 뚜껑을 열어 보라는 선생님의 말씀에 상훈이 우물쭈물 조금 열어 보인 그 도시락통 속사정은 선생님만이 비밀을 아신 채 두 녀석 간의 다툼은 그것으로 싱겁게 끝이 나고 말았다.
그 상훈의 도시락통 속을 들여다보시고 난 선생님은 그 날의 청소 당번도 다 정해 주지 않은 채 그대로 반 교실을 나가 버리신 것이었다.
그 후로도 선생님이 그 일을 다시 입에 담으신 일을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그 선생님의 가혹한 도시락 검사와 점심을 거른 아이들의 벌 청소제가 사라진 것은 바로 그 일이 있은 이후부터였다.
그 후로 그 일을 입에 올리지 않은 것은 우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우리는 말을 하지 않더라도 그 두 녀석 간의 승패나 선생님만이 보고 아신 도시락통 속 비밀은 모를 사람이 없었다.
다만 우리는 그 후 선생님이 상훈을 따로 불러 스스로 은밀히 약속하신 일이 있었던 것을 몰랐을 뿐이다.
“이제는 그 때 일을 털어놓아도 큰 허물이 안 될 일 같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며칠 뒤엔가 선생님께선 조용히 교무실로 저를 불러 말씀해 주셨지요.”
서로가 한동안 아릿한 회상에 젖어 있던 선생님과 반 친구들 앞에 상훈은 이제 모두가 같은 생각이 아니겠냐는 듯 거두절미 침묵을 깨고 그 때의 일을 회상하며 말했다.
“이제부터 나는 매끼니 내 밥그릇의 절반을 덜어 놓고 먹기로 했다. 비록 너나 네 어려운 이웃들에게 그것을 직접 나눌 수는 없더라도 누가 너를 위해 늘 자기 몫의 절반을 나누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라. 그 밥그릇의 절반 만큼한 마음이 언제고 너의 곁에 함께 하고 있음을 알고 앞으로의 어려움을 잘 이겨 나가도록 하여라.…… 선생님께선 그 몇 마디 말씀과 함께 제 등을 한 번 툭 건드려 주시는 걸로 다시 저를 돌려보내 주셨지요. 그리곤 다신 그 일을 아는 척을 않으셨고요…… 하지만 전 그 후로 언제 어디서나 그 선생님의 절반 몫의 양식을 제 곁에 가까이 느끼며 지내 왔습니다. 그리고 그 선생님의 사랑과 은덕은 저뿐만 아니라 여기 우리들 모두가 그간 알게 모르게 함께 누려 왔을 것으로 믿고 있고요. 하지만 전 선생님께서 그 때의 일을 잊지 않으시고 지금까지고 늘 그렇게 지내 오고 계실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바로 선생님의 그 덜어놓기 ‘버릇’의 내력이었다. 말할 것도 없이 그건 어쩜 ‘소식 건강요법’이나 어쩌다 몸에 익힌 당신의 ‘버릇’이기보다는 너무도 벅차고 뜨겁고 자애로운 은애의 사연이었다.
싱거울 만큼 유쾌하기만 하던 회식의 분위기에 새삼스레 숙연한 감동이 깃들었을 것은 당연한 노릇이었다. 그러나 선생님은 그것이 외려 더 불편하고 쑥스러우신 듯 어정쩡한 어조로 그 이야기의 뒤끝은 맺고 계셨다.
“그야 내 딴에 제법 생각이 없었던 일이 아니었지만, 아직 너무 세상사를 몰랐었다 할까…… 그런 일을 당하고 보니 내 자신이 너무 설익고 모자라 보이기만 하더구만. 그래 무슨 교육자랍시고 제 설익은 생각을 남에게 강요하기보다, 우선 내 지진 몫부터 절반만큼씩 줄여 나눠 가져 보자는 생각에서였을 뿐인데, 그것을 그렇게 크게 받아들여 주었다니 내가 외려 고맙고 민망스러워지네 그려. 하긴 나도 그 덕에 좋은 건강법을 익힌 셈이고, 요즘같이 교육계가 난경을 빚고 있는 마당에선 제 몫의 밥그릇을 절반으로 줄여 살기도 쉬운 일 만은 아닐 것 같아 보이네만. 그렇다고 그게 어디 이런 식의 치하까지 받아야 할 일인가. 허허…….”
글=이청준 소설가 (1939~2008)
소설가. 전남 장흥 출생. 광주제일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독문과를 졸업하였다. 한때 《사상계》를 비롯한 문학잡지사에서 근무했다. 1965년 《사상계》 신인 작품 모집에 단편 소설 「퇴원(退院)」 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1968년 《병신과 머저리》로 제12회 동인문학상을 수상하였으며, 창작집으로 《별을 보여드립니다》, 《예언자》, 《당신들의 천국》, 《자유의 문》, 《서편제》 등 중·장편집이 있다.
/ 2021.11.02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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