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한산 계곡을 걷다 / 백승훈 사색의향기 문학기행 회장(시인)
태양의 열기가 뜨겁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등줄기에 땀이 줄줄 흐르고, 접착테이프라도 달라붙은 것처럼 온몸이 끈적거린다. 이 무덥고 후텁지근한 계절을 어떻게 건너가야 할까 궁리를 해봐도 선뜻 답이 떠오르지 않을 땐 숲길을 걷는 게 상책이다. 녹음 짙은 숲길을 따라 걷다 보면 더위도 저만치 물러나고 까닭 없이 늘어나던 짜증도 제풀에 사라진다. 숲길 중에도 물소리 명랑한 계곡을 따라 걷는 것은 숲길 트레킹의 백미라 할 수 있다.
낮의 길이가 가장 길다는 하짓날, 북한산 계곡을 걸었다. 초록의 기운이 한껏 차올라 녹음 짙어진 계곡엔 맑은 물이 경쾌하게 흘러내리고 간간이 눈에 띄는 꽃들의 미소가 환했다. 북한산성 탐방센터에서 시작하여 우이천 계곡에 이르는 장거리 코스였지만 경험 많은 길라잡이와 동행한 덕분에 걷는 내내 편안하고 즐거운 숲길 트레킹을 할 수 있었다.
나이 듦이 좋은 까닭은 인생의 사계절을 두루 경험하면서 축적된 노하우가 경륜이 되고 지혜가 된다는 것이다. "젊음은 자연이 준 선물이지만 노년은 자신이 만든 예술작품이다."라는 말처럼 우리가 걸으며 경험하고 쌓아온 시간은 어느 물건보다 더 값지고 빛나는 추억이 되어줄 것이다. 도시의 한낮은 열섬 현상으로 불쾌지수가 높아질 뿐이지만 계곡을 따라 걷다 보면 자연의 화음에 마음에 평화가 찾아온다.
'월든'의 저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는 "걷는 자가 되려면 신의 은총이 필요하고 하늘의 섭리가 필요하다."고 했다. 아무리 멋진 숲길이라도 걷지 않는 사람에겐 단순한 관념적인 세상에 지나지 않지만 걷는 자에겐 살아 있는 생생한 세상이란 점을 생각하면 걸을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축복이다.
숲은 많은 생명을 품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많은 생명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생 떽쥐베리는 '어린 왕자'에서 "소중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 마음으로 보아야지"라고 했다. 관심을 가져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그런 면에서 식물이나 곤충에 대해 해박한 지식이 있는 숲 친구들과 숲길을 걷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북한산 계곡의 식물들과 꽃들의 동정을 살피며 걷는 동안 연신 환호와 탄성이 터졌다. 그 중에도 북한산 깃대종이라는 산개나리의 열매를 볼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개나리꽃은 알아도 그 열매는 본 적 없던 터였다. 소매를 잡아끌고 미처 알지 못했던 식물들에 대해 열정적으로 설명해주는 벗들 덕분에 숲길을 걷는 동안 생각의 지평이 한 뼘은 더 넓어진 느낌이다.
초록물이 뚝뚝 듣는 계곡을 따라 걷는 것만으로도 흡족했던 나는 설렁설렁 보았음에도 찍어온 사진을 보니 제법 많은 풀과 나무, 꽃들이 담겨 있다. 무심코 잎을 뜯어 씹어 보았다가 나도 모르게 침을 퉤퉤 뱉게 했던 소태나무, 꽃이 지고 열매가 맺힌 고욤나무, 한창 꽃을 피운 조록싸리와 산딸나무, 회잎나무, 탐스러운 붉은 열매를 달고 있던 딱총나무, 팽나무, 산뽕나무, 미역줄나무 등이 보인다. 그런가 하면 계곡에서 만난 꽃으로는 털중나리, 자주꿩의다리, 산꿩의다리, 노루발풀, 노루오줌 같은 꽃들도 들어 있다. 계곡을 따라 걷지 않았다면 볼 수 없었을 귀한 꽃들이다.
담장의 능소화가 골목길을 환하게 밝히는 한여름이다. 햇살이 아무리 따가워도 시치미 뚝 떼고 함초롬히 피어나는 능소화처럼 더위에 쉽게 지치기 쉬운 요즘이지만 집안에서 에어컨 바람을 쐬기보다는 작은 배낭 하나 둘러메고 숲길을 걸을 것을 강권한다. 걷는 자만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걷는 자여! 그대가 바로 새 길을 여는 사람이다.
글=백승훈 사색의향기 문학기행 회장(시인)
[출처] 글로벌이코노믹 2021-06-30
/ 2021.07.31 편집 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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