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소설읽기] '곡두운동회' 임철우 (2020.12.15)

푸레택 2020. 12. 15. 11:48

 

 

오늘은 1995년에 출간된 《한국소설문학대계(83)》 임철우의 『곡두운동회』에 실려있는 단편소설 '곡두운동회'를 읽었다. 임철우 작가는 '상처받은 인간에 대한 탁월한 시선을 가진 작가'로 알려져 있다. 소설을 다 읽은 후에야 비로소 작가가 이 소설의 제목을 '곡두운동회'로 지었는지 알 수 있었다. '곡두 운동회'를 읽으며 다시는 이 땅에 전쟁의 비극이 없기를, 우리의 아이들이 평화로운 땅에서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진다.

■ 곡두운동회 / 임철우

― 그해 8월 ○일 금요일 새벽 4시

바닷가 그 작은 마을을 난데없이 찌렁찌렁 울려 대기 시작한 그 요란한 노랫소리에 놀란 주민들 팔백여명은 약속이나 한 듯이 거의 동시에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무리 아침잠을 모르고 일찍 일어나는 시골 사람들이라고는 하지만, 적어도 날이 밝기 한두 시간 전인 그 시각은 누구라 할 것 없이 가장 달고 곤한 잠에 빠져 있을 때였다. 때마침 구름 한 점 없는 여름밤 하늘은 무수한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고, 바다는 유난히 잔잔했으며, 바람 또한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었다. 간밤 늦게까지 극성을 부리던 물것들도 새벽녘의 한기에 주눅이 들었는지 차츰 뜸해지고 선창 맞은편 작은 무인도의 울창한 수풀 속에서 늙은 부엉이도 울기를 멈춘 지 오래였다. 이따금 풀섶에서는 지친 풀벌레의 울음이 잔뜩 목에 잠겼고 , 다만 바다 쪽으로부터 부드러운 물결이 차르르 차르르 기슭을 핥는 소리만 간간히 들려 오고 있을 뿐이었는데 어느 한순간 웬 요란스럽고 당돌맞은 소음들이 느닷없이 그 깊은 정적을 산산조각으로 흩뜨리며 아직 짙은 어둠에 혼곤하게 잠겨 있는 온 마을을 우렁우렁 흔들어 대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 즈음 연일 계속되어 온 무더위에 시달리느라 대부분 얇은 셔츠 바람이거나 아예 웃통을 훌훌 벗어 제친 알몸뚱이로 잠자리에 들었었다가 얼결에 놀라 후다닥 눈을 짼 그 마을 주민들은 미처 눈곱으로 뻑뻑한 눈두덩을 비벼 볼 겨를조차 없이 저마다 그 난데없는 소동이 도대체 꿈인지 생시인지를 가려 보느라 한동안 멍멍해져 있었을 따름이었다. 아마도 그 소란통에 맨 먼저 귀가 벌어진 것은 잠이 없는 늙은이들이었을 터이고, 뒤이어 아직 힘깨나 남았을 젊은 축들은 코를 골다가 일어나 우선 곁에 누워 있는 아내 혹은 남편을 황급히 흔들어 깨웠을 것이며, 아이들이란 본디 잠이 기어 잠귀 역시 먼 법이므로 맨 나중에야 깨어나서는 훌렁 이불을 머리꼭지까지 뒤집어쓰거나 더러는 놀란 울음부터 애앵 터뜨리거나 했을 것이다.

(중략)

얼마의 세월이 흐른 뒤 전쟁은 끝이 났고 바닷가 그 작은 마을에도 민첩한 도둑처럼 다시 평화가 숨어 들어왔다. 그 동안 마을 주민의 전체 수효는 전보다 오히려 줄어들어 있었지만, 그 부족한 자리를 채우기까지에는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여자들은 부지런히 아이를 낳았으며, 갓 짝을 맺은 젊은 부부들은 주인 없이 오래 버려져 있던 빈집들을 허물어뜨리고 그 자리에 새로운 집을 지어 살림을 차렸다. 그래도 해마다 팔월 어느 날이면 마을의 꽤 많은 집들마다에는 한꺼번에 똑같이 제사상이 차려지곤 했지만, 무심한 세월은 사람들의 쓰디쓴 기억의 잔에다가 조금씩 조금씩 맹물을 타넣어 주었으므로 오래지 않아 그들은 어느 해 한여름 대낮의 그 기괴한 곡두놀음쯤이야 쉬이 잊어버릴 수 있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하늘이 유리알처럼 맑은 가을날을 잡아 마을 서쪽 바닷가의 학교 운동장에서는 예전처럼 다시 운동회가 열렸고, 그때마다 온 마을 사람들은 청군과 백군으로 나뉘어 한바탕 열띤 응원을 벌이며 박수를 치고 만세를 불렀다. 그러다가도 나이 지긋한 어른들은 별안간 불안스런 시선으로 서로의 얼굴을 힐끗힐끗 훔쳐보며 문득 어두운 얼굴을 짓곤 했는데, 아직 어린 꼬마들은 도통 그 까닭을 알 수가 없었다. (끝)

* 곡두: 실제로는 눈앞에 없는 사람이나 물건이 마치 있는 것처럼 보이다가 사라져 버리는 현상

[출처] 『곡두운동회』(동아출판사, 1995) - 《한국소설문학대계 83》

/ 2020.12.15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