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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민의 사이언스 빌리지] 우리의 안전·행복은 누군가의 희생입니다 (2022.03.12)

푸레택 2022. 3. 12. 14:34

[김병민의 사이언스 빌리지] 우리의 안전·행복은 누군가의 희생입니다 (daum.net)

 

[김병민의 사이언스 빌리지] 우리의 안전·행복은 누군가의 희생입니다

철이 물과 산소를 만나면 녹슬어 결국 사라지게 됩니다. 철이 지닌 자유전자를 다른 물질에 빼앗겨 철의 결정은 유지될 수 없는 겁니다. 과학은 이런 변화 과정을 '산화' 혹은 '부식'이라고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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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민의 사이언스 빌리지] 우리의 안전·행복은 누군가의 희생입니다

영국 왕립화학대학 말라리아 치료제 개발 지원..선택적 약물 치료 길 열어
1차대전 때 의대 출신 도마크, 설파제 첫선..딸 대상 실제 인체실험 성공
의료진·공무원 무더위 속 묵묵히 희생..지금 필요한건 응원보다 방역협조

철이 물과 산소를 만나면 녹슬어 결국 사라지게 됩니다. 철이 지닌 자유전자를 다른 물질에 빼앗겨 철의 결정은 유지될 수 없는 겁니다. 과학은 이런 변화 과정을 '산화' 혹은 '부식'이라고 설명하죠. 염분과 산소가 풍부한 바다에서는 반응이 가속돼 부식 속도는 빨라집니다. 그래서 선박 건조 시 고려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녹스는 것을 방지하는 일입니다.

이때 철보다 빨리 산화하는 금속을 철 위에 덧대면 철 대신 먼저 녹슬어 배가 안전하게 유지됩니다. 아연이나 마그네슘처럼 철보다 먼저 녹스는 물질을 화학에서는 '희생양극'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희생양극이라는 말은 물질에만 적용되는 게 아닙니다. 소명 의식을 지니고 먼저 희생하는 사람들에게도 이 말이 적용됩니다.

현재 인류는 화학으로 철의 산화 반응이 전자의 이동이라는 의미를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화학이 학문으로 정립되기 시작하던 비교적 가까운 시기까지 물질의 기원은 물론 정체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죠.

사실 화학이 과학다운 학문 분야로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영국의 로버트 보일(1627~1691)이 연금술사와 화학자의 구별에 대해 언급한 '회의적 화학자'라는 책을 발간한 1661년부터였습니다. 그러나 화학은 여전히 19세기 후반까지 이르는 긴 시간 동안 청소년의 정체성 혼란과 같은 방황의 시기를 보냅니다.

심지어 화학은 석탄에서 나온 타르나 염료 등을 다루는 사업가들의 과학이었습니다. 과학자로 불리던 학자들은 물리학과 자연사 혹은 지질학을 다뤘죠. 일례로 영국은 왕립화학대학을 설립해 영입한 천재적인 화학자의 연구 지원에 나섰습니다. 말라리아 치료제를 개발하기 위해서였죠. 그러나 당시 연구에 사용된 재료라고 해봐야 흔한 콜타르였습니다. 사람들은 자연이 만든 미지의 물질에 질병과 맞설 수 있는 뭔가 숨어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엉뚱하게도 아름다운 보랏빛 염료를 발견하게 됩니다. 역청탄을 고온 건조하면 양질의 탄소 성분인 코크스와 끈적끈적하고 고약한 냄새가 나는 콜타르가 나옵니다. 코크스는 당시 에너지원으로 사용했으나 콜타르는 폐기물 취급을 받았죠. 이런 콜타르와 어울릴 것 같지 않던 아름다운 염료를 연결한 것이 화학입니다. 그런데 염료가 단지 빅토리아 시대를 화려하게 장식한 물질로만 사용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현미경으로 촬영한 세포 사진을 본 적이 있을 겁니다. 사진에서 세포 안의 특정 위치가 명확하고 선명한 색깔로 표시된 것은 사실 염료 때문이죠. 19세기 후반 인류는 합성염료로 조직과 세포가 선택적으로 염색될 수 있음을 알게 됐습니다. 이후 인류는 생명공학과 의학 분야로 눈을 돌리게 됩니다.

당시 인간 질병의 대부분이 미생물 때문이라는 것은 이미 알려져 있었습니다. 인류를 구하기 위한 노력은 예방과 치료라는 두 길로 나뉘었습니다. 예방에서는 이미 18세기 후반 천연두를 시작으로 백신 개념이 등장했죠. 하지만 치료제인 항생 물질을 찾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합성염료의 등장이 치료제 개발을 돕게 됩니다. 어떤 염료가 특정 세포를 염색한다면 그 부위에 선택적으로 약물이 들어갈 수 있도록 염료와 약물만 연결하면 되겠다는 생각이었죠. 이런 가정은 현실로 이뤄졌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전쟁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2001)'는 실제 전쟁과 매우 가깝게 묘사됐습니다. 부상병의 환부에 하얀 가루를 뿌리는 장면도 나옵니다. 당시 연합군은 구급약으로 이 가루를 항상 소지하고 다녔습니다. 분명 상처 감염을 치료하는 항생계 약물입니다. 이 약물은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1874~1965)을 폐렴으로부터 구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이 약물은 전범국인 독일의 한 과학자의 희생으로 만들어집니다. 20세기 초 제1차 세계대전에서 군인들은 상처 감염으로 많은 희생을 치릅니다. 심지어 대수롭지 않은 상처로 염증이 온몸에 퍼져 신체 일부를 절단하거나 목숨을 잃었죠. 이처럼 항생제가 없던 시절에는 상처 하나로도 목숨이 위태로웠습니다.

당시 위생병으로 참전한 독일의 의대생 게르하르트 도마크(1895~1964)는 감염성 질환을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그는 종전 후 독일의 화학기업들이 지원하는 감염병 연구소의 총책을 맡게 됩니다. 독일군도 감염병으로 큰 희생을 치렀으니 감염병 극복은 국가적 사명이었을 겁니다.

도마크는 결국 세포벽에 잘 붙는 염료와 '설폰아마이드'를 합성해 세균 질환 치료의 문턱까지 갑니다. 동물실험까지 마친 임상 전 상태였죠. 바로 이 물질이 '설파제'로 알려진 약물입니다.

모든 약물은 임상을 거쳐야 하는 게 상식입니다. 임상 시험 직전까지 간 도마크는 놀랍게도 실험 대상으로 자기의 어린 딸을 택합니다. 아무리 동물실험을 거쳤다 해도 대상이 인간으로 옮겨지면 알 수 없는 원인 탓에 생명까지 위태로울 수 있죠. 이전 독일에서 만든 화학적 합성약물인 매독 치료제도 600번 이상 시험을 거쳐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효과에 비해 부작용이 커 임상은 쉽지 않았을 겁니다.

임상을 성공적으로 거쳤다 해도 끝이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설파제 완성 후 알약 복용이 힘든 어린이들을 위해 복용하기 쉽게 액상 형태로 만드는 데 유기용매가 사용됐죠. 그러나 유기용매의 독성으로 아이들의 신장이 망가졌습니다. 당시 100명 이상의 아이가 사망했죠. 단맛이 나는 알코올인 그 용매는 오늘날 자동차 부동액 원료로 사용되는 에틸렌글리콜이었습니다.

도마크는 왜 위험한 시험에 선뜻 자기의 소중한 가족을 끌어들였을까요? 당시 상처가 생긴 딸의 팔에는 염증이 퍼져 절단해야 할 지경까지 이르게 된 겁니다. 도마크는 자기가 만든 설파제를 딸에게 먹였습니다. 그 결과 염증에 효과가 있음을 입증했습니다. 자기 인생과 가족의 목숨까지 담보로 한 희생이 인류의 생명을 살린 계기가 된 거죠.

노벨위원회는 1939년 노벨 생리학ㆍ의학 수상자로 설파제 발명자인 도마크를 선정했습니다. 하지만 나치 독일은 정치적 이유로 독일인의 노벨상 수상을 금했습니다. 도마크는 스스로 수상 거부를 서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도 모자라 또 다른 희생까지 치르게 됩니다.

흔히들 항생제 하면 알렉산더 플레밍(1881~1955)이 만든 페니실린을 떠올립니다. 사실 설파제는 페니실린의 등장과 함께 항생제 자리를 내줬죠. 하지만 플레밍도 도마크의 연구로부터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페니실린의 등장이 도마크라는 희생양극 같은 비운의 인물과 무관하진 않을 겁니다.

때 이른 더위가 찾아왔습니다. 최근 인천 미추홀구에서 워크스루 운영 중 방호복을 입은 보건소 직원들이 더위에 탈진해 쓰러졌습니다. 수분을 섭취하면 그나마 나으련만 방호복 때문에 화장실에 가기조차 어려워 물도 잘 마시지 못했다고 합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으로 모든 것이 무너질 때 자기의 안위보다 스스로 아연의 길을 택한 사람들, 정은경 질병관리본부장을 비롯한 관련 기관 공무원들, 숨 막히는 방역복까지 입고 의료현장에서 환자를 돌봐온 의료진. 이들이 희생양극이었기에 지금 우리가 그들의 희생을 밟고 안전하게 서 있는 것입니다.

질병관리본부를 보건복지부 외청인 질병관리청으로 독립시키겠다는 정부조직법 개정안이 최근 발의됐습니다. 감염병 대응에 전문성을 더하겠다는 거죠. 그러나 감염병 연구의 핵심인 국립보건연구원의 조직 내 지리적 위치를 두고 잡음이 들립니다. 그리고 복지부가 최일선에서 싸워 온 간호사들을 위한 예산 편성을 누락한 사실도 알려져 의료진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그들은 업의 본질을 엄숙하게 지켜나가고 있습니다. 감염병은 감춰진 우리의 민낯을 비춥니다. 그들이 원하는 건 고마움도 금전도 아닌 감염병의 종식입니다.

최근 코로나19의 수도권 감염이 확산되고 있죠.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응원이 아니라 방역 협조입니다. 우리가 누리고 지키고자 하는 일상은 희생양극 같은 이들이 없다면 철처럼 사라질지 모르는 소중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글=김병민 한림대학 나노융합스쿨 겸임교수ㅣ아시아경제 2020.06.17

/ 2022.03.12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