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작수필] 「구두」 계용묵 (2020.04.07)

푸레택 2020. 4. 7. 10:39

 

 

 

 

 

● 구두 / 계용묵(桂鎔默)

 

구두 수선(修繕)을 주었더니, 뒤축에다가 어지간히도 큰 징을 한 개씩 박아 놓았다. 보기가 흉해서 빼어 버리라고 하였더니, 그런 징이래야 한동안 신게 되고, 무엇이 어쩌구 하며 수다를 피는 소리가 듣기 싫어 그대로 신기는 신었으나, 점잖지 못하게 저벅저벅, 그 징이 땅바닥에 부딪치는 금속성 소리가 심히 귓맛에 역(逆)했다. 더욱이, 시멘트 포도(鋪道)의 딴딴한 바닥에 부딪쳐 낼 때의 그 음향(音響)이란 정말 질색이었다. 또그닥 또그닥, 이건 흡사 사람이 아닌 말발굽 소리다.

 

어느 날 초어스름이었다. 좀 바쁜 일이 있어 창경원(昌慶苑) 곁담을 끼고 걸어 내려오노라니까, 앞에서 걸어가던 이십 내외의 어떤 한 젊은 여자가 이 이상히 또그닥거리는 구두 소리에 안심이 되지 않는 모양으로, 슬쩍 고개를 돌려 또그닥 소리의 주인공을 물색하고 나더니, 별안간 걸음이 빨라진다.

 

그러는 걸 나는 그저 그러는가 보다 하고, 내가 걸어야 할 길만 그대로 걷고 있었더니, 얼마쯤 가다가 이 여자는 또 뒤를 한 번 힐끗 돌아다본다. 그리고 자기와 나와의 거리가 불과 지척(咫尺)임을 알고는 빨라지는 걸음이 보통이 아니었다. 뛰다 싶은 걸음으로 치맛귀가 옹이하게 내닫는다. 나의 그 또그닥거리는 구두 소리는 분명 자기를 위협하느라고 일부러 그렇게 따악딱 땅바닥을 박아 내며 걷는 줄로만 아는 모양이다.

 

그러나 이 여자더러 내 구두 소리는 그건 자연(自然)이요, 인위(人爲)가 아니니 안심하라고 일러 드릴 수도 없는 일이고 해서, 나는 그 순간 좀 더 걸음을 빨리하여 이 여자를 뒤로 떨어뜨림으로 공포(恐怖)에의 안심을 주려고 한층 더 걸음에 박차를 가했더니, 그럴 게 아니었다. 도리어 이것이 이 여자로 하여금 위협이 되는 것이었다.

 

내 구두 소리가 또그닥 또그닥, 좀 더 재어지자 이에 호음하여 또각또각, 굽 높은 뒤축이 어쩔 바를 모르고 걸음과 싸우며 유난히도 몸을 일어 내는 분주함이란, 있는 마력(馬力)은 다 내보는 동작에 틀림없다. 그리하여 한참 석양 놀이 내려비치기 시작하는 인적 드문 포도(鋪道) 위에서 또그닥또그닥, 또각또각 하는 이 두 음향의 속 모르는 싸움은 자못 그 절정에 달하고 있었다.

 

나는 이 여자의 뒤를 거의 다 따랐던 것이다. 2, 3보(步)만 더 내어 디디면 앞으로 나서게 될 그럴 계제였다. 그러나 이 여자 역시 힘을 다하는 걸음이었다. 그 2,3보라는 것도 그리 용이히 따라지지 않았다. 한참 내 발뿌리에도 풍진(風塵)이 일었는데, 거기서 이 여자는 뚫어진 옆골목으로 살짝 빠져 들어선다. 다행한 일이었다. 한숨이 나간다. 이 여자도 한숨이 나갔을 것이다. 기웃해 보니, 기다랗고 내뚫린 골목으로 이 여자는 횡하니 내닫는다. 이 골목 안이 저의 집인지, 혹은 나를 피하느라고 빠져 들어갔는지 그것을 알 바 없었으나, 나로선 이 여자가 나를 불량배로 영원히 알고 있을 것임이 서글픈 일이다.

 

여자는 왜 그리 남자를 믿지 못하는 것일까. 여자를 대하자면 남자는 구두 소리에까지도 새심한 주의를 가져야 점잖다는 대우를 받게 되는 것이라면, 이건 이성(異性)에 한 모욕이 아닐까 생각을 하며, 나는 그 다음으로 그 구두징을 뽑아 버렸거니와 살아가노라면 별(別)한 데다가 다 신경을 써 가며 살아야 되는 것이 사람임을 알았다.

 

♤ 작가 소개

 

계용묵(桂鎔默, 1904~1961) : 평북 선천 출생으로 소설가이다. 어린 때부터 한학을 배웠고 휘문고보 및 일본 농양대학에서 수학하였다. 주로 출판업계에 종사하였으며, 1925년 (조선문단》에 소설 <상환>을 발표하고 등단하였다. 이후 장작활동에 전념하였으며 그의 수필은 주로 서민들의 애환 및 생활상을 다루고 있다. 이는 그의 소설들에서도 발견되는 주요 소재로써 유려한 필치로 그러져 있지만 매우 나약한 모습들을 주로 묘사함으로써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단편집에 (병풍에 그린 닭이》, <백치 아다다), <별을 헨다> 등이 있으며, 수필집으로는 <상아탑>이 있다.

 

♤ 작품 해설

 

우리의 주변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을 무심코 지나치지 않고 어떤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관찰의 자세가 수필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의 하나이다. 같은 산문의 유형에 속하는 소설과 달리 길이도 짧고 허구적인 성격을 띠지 않으면서도 때에 따라서는 허구의 세계가 보여 주는 것보다 훨씬 깊은 의미

를 줄 수 있는 것은 바로 현실세계를 세밀하게 관찰하는데서 오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은 소설과 다른 측면에서 우리에게 생환의 묘미를 알게 해주

는 수필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이 글은 구두를 수선한 후 발생한 우연적인 일을 세밀하게 다루고 있다.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수선된 구두 징소리로 인해 발생한 사건을 통해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도 남과의 관계 속에 놓이면 남에게는 중요한 일이 될 수도 있음을 말하고 있다. 단지 소리가 크게 나는 구두를 신고 호젓한 길에서 우연히 한 여성의 뒤를 따른 것이 생각지도 않게 그 여성에게는 불안감을 줄 수도 있다는 것을 발견했던 필자는 매우 당혹스러움을 느꼈을 것이다. 이 당혹스러움은 생활의 단편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며 이 발견은 필자로 하여금 별난 데에 신경을 쓰고 살아야 하는 것이 삶이 아닌가 라는 인식까지도 하게 한다.

 

소셜 속에서나 가능한 것으로 생각했던 일들이 실제의 생활 속에서도 얼마는지 일어날 수 있으며 그러한 상황을 실감있게 그려낸데 이 수필의 특징이

있다. 사건의 소설적 전개방식, 실감있는 분위기의 조성과 그 분위기에서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또그닥또그닥', '또각또각' 등의 의성어의 사용은 이 수필이 주는 구성의 묘미이다. 독자들은 이러한 표현법, 구성법들에 유념하면서 글을 읽을 때 또다른 흥미를 얻을 수 있다.

 

[출처] 《고교생이 알아야할 에세이》 발췌

 

/ 2020.04.07 편집 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