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작수필] 「어린이 찬미」 방정환 (2019.04.07)

푸레택 2020. 4. 7. 10:34

 

 

 

 

 

● 어린이 찬미 / 방정환(方定煥)

 

(1)

 

어린이가 잠을 잔다. 내 무릎 앞에 편안히 누워서 낮잠을 달게 자고 있다. 볕 좋은 첫 여름 조용한 오후이다. 고요하다는 고요한 것을 모두 모아서 그 중 고요한 것만 골라 가진 것이 어린이의 자는 얼굴이다. 평화라는 평화 중에 그 중 훌륭한 평화만을 골라 가진 것이 어린이의 자는 얼굴이다. 아니, 그래도 나는 이 고요히 자는 얼굴을 잘 말하지 못하였다. 이 세상의 고요하다는 고요한 것은 모두 이 얼굴에서 우러나는 것 같고, 이 세상의 평화라는 평화는 모두 이 얼굴에서 우러나는 듯싶게 어린이의 잠자는 얼굴은 고요하고 평화롭다.

 

고운 나비의 날개…… 비단결 같은 꽃잎, 아니, 아니 이 세상에 곱고 보드랍다는 아무것으로도 형용할 수 없이 보드랍고 고운 이 자는 얼굴을 들여다보라! 그 서늘한 두 눈을 가볍게 감고, 이렇게 귀를 기울여야 들릴 만큼 가늘게 코를 골면서 편안히 잘 자는 이 좋은 얼굴을 들여다보라! 우리가 전부터 생각해 오던 하느님의 얼굴을 여기서 발견하게 된다. 어느 구석에 먼지만큼이나 더러운 티가 있느냐? 어느 곳에 우리가 싫어할 것이 한 가지 반 가지나 있느냐? 죄 많은 세상에 나서 죄를 모르고, 더러운 세상에 나서 더러움을 모르고, 부처보다도 예수보다도 하늘 뜻 고대로의 산 하느님이 아니고 무엇이랴.

 

아무 꾀도 갖지 않는다. 아무 계획도 모른다. 배고프면 먹을 것을 찾고, 먹어서 배부르면 웃고 즐긴다. 싫으면 찡그리고, 아프면 울고…… 거기에 무슨 꾸밈이 있느냐? 시퍼런 칼을 들고 대들어도 맞아서 아프기까지는 방글방글 웃으며 대하는 이가, 이 넓은 세상에 이직 이 어린이가 있을 뿐이다.

 

오오, 어린이는 지금 내 무릎 앞에서 잠을 잔다. 더할 수 없는 참됨과. 더할 수 없는 착함과, 더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갖추고, 게다가 또 위대한 창조의 힘까지 갖추어 가진 어린 하느님이 편안하게 고용한 잠을 잔다. 옆에서 보는 사람의 마음속까지 생각이 다른 번잡한 것에 미칠 틈을 주지 않고 고결하게 순화시켜 준다.

 

나는 지금 성당에 들어간 이상의 경건한 마음으로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사랑스런 하느님, 위엄뿐만의 하느님이 아니고, 자는 그 얼굴에 예배하고 있다.

 

(2)

 

어린이는 복되다!

 

이때까지 모든 사람들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복을 준다고 믿어 왔다. 그 복을 많이 가져온 이가 어린이다. 그래 그 한없이 많이 가지고 온 복을 우리에게도 나누어 준다. 어린이는 순 복덩어리다.

 

마른 잔디에 새 풀이 나고, 나뭇가지에 새 움이 돋는다고 제일 먼저 기뻐 날뛰는 이도 어린이다. 봄이 왔다고 종달새와 함께 노래하는 이도 어린이고, 꽃이 피었다고 나비와 함께 춤을 추는 이도 어린이다. 별을 보고 좋아하고 달을 보고 노래하는 것도 어린이요, 눈 온다고 기뻐 날뛰는 이도 어린이다.

 

산을 좋아하고, 바다를 사랑하고, 큰 자연의 모든 것을 골고루 좋아하고 진정으로 친해 하는 이가 어린이요, 태양과 함께 춤추며 사는 이가 어린이다.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기쁨이요, 모든 것이 사랑이요, 또 모든 것이 친한 동무다. 자비와 평등과 박애와 환희와 행복과, 이 세상 모든 아름다운 것만 한없이 많이 가지고 사는 이가 어린이다. 어린이의 살림 그것 그대로가 하늘의 뜻이다, 우리에게 주는 하늘의 계시다.

 

어린이의 살림에 친근할 수 있는 사람, 어린이 살림을 자주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 배울 수 있는 사람은 그만큼 행복을 얻을 것이다.

 

(3)

 

어린이와 얼굴을 마주 대하고는 우리는 찡그리는 얼굴, 성낸 얼굴, 슬픈 얼굴을 못 짓게 된다. 아무리 성질이 곱지 못한 사람일지라도 어린이의 얼굴을 마주하고는 험상한 얼굴을 못 가질 것이다. 어린이와 마주앉을 때―적어도 그 잠깐 동안은―모르는 중에 마음의 세례를 받고 평상시에 가져 보지 못하는, 마소를 띤 부드러운 좋은 얼굴을 갖게 된다. 잠깐 동안일망정 그 동안은 순화된다. 깨끗해진다. 어떻게든지 우리는 그 동안, 순화되는 동안을 자주 가지고 싶다.

 

하루라도 삼천 가지 마음, 지저분한 세상에서 우리의 맑고도 착하던 마음이 얼마나 쉽게 굽어가려고 하느냐? 그러나 때로 은방울을 흔들면서 참됨이 있으라고 일깨워 주고, 지시해 주는 어린이의 소리와 행동은 우리에게 큰 구제의 길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피곤한 몸으로 일에 절망하고 늘어질 때, 어둠에 빛 가는 광명의 빛이 우리 가슴에 한 줄기 빛을 던지고 새로운 원기와 위안을 주는 것도 어린이뿐만이 가진 존귀한 힘이다. 어린이는 슬픔을 모른다. 근심을 모른다. 그리고 음울한 것을 싫어한다. 어느 때 보아도 유쾌하고 마음 편하게 논다. 기쁨으로 살고, 기쁨으로 놀고, 기쁨으로 커 간다. 뻗어나가는 힘! 뛰노는 생명의 힘! 그것이 어린이다. 온 인류의 나아짐과 높아짐도 여기 있는 것이다.

 

어린이에게서 기쁨을 빼앗고 어린이 얼굴에다 슬픈 빛을 지어주는 사람이 있다 하면, 그보다 더 불행한 사람이 없을 것이요, 그보다 더 큰 죄인은 없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 사람처럼 더 불행하고 더 큰 죄인은 없을 것이다.

 

어린이의 기쁨을 상해 주어서는 못 쓴다! 그러할 권리도 없고, 그러할 자격도 없건마는…… 무지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어린이들의 얼굴에 슬픈 빛을 지어 주었느냐?

 

어린이들의 기쁨을 찾아주어야 한다.

어린이들의 기쁨을 찾아주어야 한다.

어린이는 아래의 세 가지 세상에서 온통것을 미화시킨다.

이야기 세상 ― 노래 세상 ― 그림 세상.

 

어린이의 나라에 세 가지 예술이 있다. 어린이들은 아무리 엄격한 현실이라도 그것을 이야기로 본다. 그래서 평범한 일도 어린이의 세상에서는 그것이 예술화하여 찬란한 아름다움과 흥미를 더하여 가지고 어린이 머릿속에 다시 전개된다. 그래서 항상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아름답게 본다.

 

어린이들은 또 실제로 경험하지 못한 일을 이야기 세상에서 훌륭히 경험한다. 어머니와 할머니 무릎에 앉아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을 때, 그는 아주 이야기에 동화해 버려서 이야기 세상 속에 들어가서 이야기에 따라 왕자도 되고, 고아도 되고, 또 나비도 되고, 새도 된다. 그렇게 해서 어린이들은 자기가 가진 행복을 더 늘려가고 기쁨을 더 늘려가는 것이다.

 

어린이는 모두 시인이다. 본 것을, 느낀 것을, 그대로 노래하는 시인이다. 고운 마음을 가지고, 어여쁜 눈을 가지고, 아름답게 보고 느낀 그것이 아름다운 말로 굴러나올 때, 나오는 모두가 시가 되고, 노래가 된다.l 여름날 무성한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보고 ‘바람의 어머니가 아들을 보내어 나무를 흔든다.’ 하는 것도 그대로 시요, 오색이 찬란한 무지개를 보고, ‘하느님, 따님이 오르내리는 다리다.’고 하는 것도 그대로 시다.

 

갠 밤, 밝은 달의 검은 점을 보고는.

저기저기 저 달 속에

계수나무 박혔으니,

금도끼로 찍어내고

옥도끼로 다듬어서

초가삼간 집을 짓고

천년만년 살고지고.

 

고운 소리를 높여 이렇게 노래를 부른다. 밝디 밝은 달님 속에 계수나무를 금도끼ㆍ옥도끼로 찍어내고, 다듬어서 초가삼간 집을 짓자는 생각이 얼마나 곱고 아름다운 생활의 소유자냐?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 나무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이러한 고운 노래를 기꺼운 마음으로 소리 높여 부를 때, 그들의 고운 넋이 얼마나 아름답게 우쭐우쭐 자라갈 것이랴!

 

위의 두 가지 노래는 어린이 자신의 속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고, 큰 사람이 지은 것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몇 해 몇 십 년 동안 어린이들의 나라에서 불러 내려서 어린이의 것이 되어 내려온 거기에 그 노래에 스며진 어린이의 생각, 어린이의 살림, 어린이의 넋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어린이는 그림을 좋아한다. 그리고 또 그리기를 좋아한다. 아무런 기교가 없는 순진한 예술을 낳는다. 어른의 상투를 재미있게 보았을 때, 어린이는 몸뚱이보다 큰 상투를 그려놓는다. 순경의 칼을 이상하게 보았을 때, 어린이는 순경보다 더 큰 칼을 그려 놓는다. 얼마나 솔직한 표현이냐? 얼마나 순진한 예술이냐!

 

지나간 해 여름이다. 서울 천도교당에 여섯 살 된 어린이에게 이 집 교당을 그려보라 한 일이 있었다. 어린이는 서슴지 않고 종이와 붓을 받아들더니 거침없이 네모 번듯한 4각 하나를 큼직하게 그려서 나에게 내밀었다. 얼마나 놀라운 일이냐. 그 어린이는 그 큰 집에 들어앉아서 그 집을 보기를 크고 네모 번듯한 넓은 집이라고밖에 더 달리 복합하게 보지 아니한 것이었다. 얼마나 순진스럽고 솔직한 표현이냐! 거기에 아직 더럽혀지지 아니한, 마침내는 큰 예술을 낳아 놀 두려운 참된 힘이 숨겨 있다고 나는 믿는다. 한 포기 풀을 그릴 때, 어린 예술가는 연필을 잡고 거리낌없이 쭉쭉 풀포기를 그린다.

 

그러나 그 한 번에 쭉 내리 그은 그 줄이 얼마나 복잡하고 묘하게 자상한 설명을 주는지 모른다.

 

위대한 예술을 품고 있는 어린이여! 어떻게도 이렇게 자유로운 행복만을 갖추어 가졌느냐.

 

어린이는 복되다. 어린이는 복되다. 한이 없는 복을 가진 어린이를 찬미하는 동시에, 나는 어린이 나라에 가깝게 있을 수 있는 것을 얼마든지 감사한다. <1924. 5. 15>

 

[출처] 방정환 《소파수필선》 (을유문화사, 1969)

 

/ 2020.04.07 편집 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