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작수필] 「부끄러움」, 「마고자」, 「박사장의 하루」 윤오영 (2020.04.06)

푸레택 2020. 4. 6. 21:47

 

 

 

 

 

● 부끄러움 / 윤오영

 

고개 마루턱에 방석소나무가 하나 서 있었다. 애까지 오면 거진 다 왔다는 생각에 마음이 홀가분해진다. 이 마루턱에서 보면 야트막한 산 밑에 올망졸망

초가집들이 들어선 마을이 보이고 오른쪽으로 넓은 마당 집이 내진외가로 아저씨뻘 되는 분의 집이다.

 

아는 여름 방학이 되어 집에 내려오면 한 번씩은 이 집을 찾는다. 이 집에는 나보다 한 살 아래인, 열세 살 되는 소녀가 있었다. 실상 촌수를 따져 가며 통내외까지 할 절척도 아니지만 서로 가깝게 지내는 터수라, 내가 가면 여간 반가워하지 아니했고, 으레 그 소녀를 오빠가 왔다고 불러 내어 인사를 시키곤 했다. 소녀의 몸매며 옷매무새는 제법 색시꼴이 박히어 가기 시작했다. 그 때만 해도 시골서 좀 범절 있다는 가정에서는 열살만 되면 벌써 처녀로서의 예모를 갖추었고 침선이나 음식 솜씨도 나타내기 시작했다.

 

집 문 앞에는 보리가 누렇게 패어 있었고, 한편 들에서는 일꾼들이 보리를 베기 시작했다. 나는 사랑에 들어가 어른들을 뵙고 수인사 겸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로 얼마 지체한 뒤에, 안 건너방으로 안내를 받았다. 점심 대접은 하려는 것이다. 사랑방은 머슴이며, 일꾼들이 드나들고 어수선했으나, 건너방은

조용하고 깨끗했다. 방도 말짱히 치워져 있고, 자리도 깔려 있었다. 아주머니는 오빠에게 나와 인사하라고 소녀를 불러 냈다.

 

소녀는 미리 준비를 차리고 있었던 모양으로 옷도 갈아 입고 머리도 곱게 매만져 있었다. 나도 옷고름을 매만지며 대청으로 마주 나와 인사를 했다. 작년보다는 훨씬 성숙해 보였다. 반쯤 닫힌 안방 문 사이로 경대 반짇고리들이 한편에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지금 막 건너방에서 옮겨 간 것이 틀림없었다.

아주머니는 일꾼들을 보살피러 나가면서 오빠 점심 대접하라고 딸에게 일렀다.

 

조금 있다가 딸은 노파에게 상을 들려 가지고 왔다. 닭국에 말은 밀국수다. 오이소배기와 호박눈썹나물이 놓여 있었다. 상차림은 간소하나 정결하고 깔밋했다. 소녀는 촌이라 변변치는 못하지만 많이 들어 달라고 친숙하고 나직한 목소리로 짤막한 인사를 날기고 곱게 문을 닫고 나갔다.

 

남창으로 등을 두고 앉았던 나는 상을 받느라고 돗자리 길이대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맞은편 벽 모서리에 걸린 본홍 적삼이 비로소 눈에 띄었다. 곤때가 약간 묻은 소녀의 분홍 적삼이. 나는 야릇한 호기심으로 자꾸 쳐다보지 아니할 수 없었다. 밖에서 무엇인가 수런수런하는 기색이 들렸다. 노파의 은근한 웃음 섞인 소리도 들렸다.

 

괜찮다고 염려말라는 말 같기도 했다. 그러더니 노파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밀국수도 촌에서는 별식이니 맛없어도 많이 먹으라느니 너스레를 놓더니, 슬쩍 적삼을 떼어 가지고 나가는 것이었다.

 

상을 내어갈 때는 노파 혼자 들어오고, 으레 따라올 소녀는 나타나지 아니했다. 적삼 들킨 것이 무안하고 부끄러웠던 것이다. 내가 올 때 아주머니는 오빠가 떠난다고 소녀를 불렀다. 그러나 소녀는 안방에 숨어서 나타나지 아니했다. 아주머니는 "갑자기 수줍어졌니, 얘도 새롭기는."하며 미안한 듯 머뭇머뭇 기다렸으나 이내 소녀는 나오지 아니했다. 나올 때 뒤를 흘낏 훔쳐본 나는 숨어서 반쯤 내다보는 소녀의 뺨이 확실히 붉어 있음을 알았다. 그는 부끄러웠던 것이다.

 

● 마고자 /윤오영

 

나는 마고자를 입을 때마다 한국 여성의 바느질 솜씨를 칭찬한다. 남자의 의복에서 가장 사치스러운 호사가 마고자다. 바지, 저고리, 두루마기 같은 다른 옷보다 더 값진 천을 사용한다. 또, 남자옷에 패물이라면 마고자의 단추다.

 

마고자는 방한용이 아니요 모양새다. 방한용이라면 덧저고리가 있고 잘덧저고리도 있다. 화려하고 찬란한 무늬가 있는 비단 마고자나 솜둔 것은 촌스럽고 청초한 겹마고자가 원격이다. 그러기에 예전에 노인네가 겨울에 소탈하게 방한 삼아 입으려면 그 대신에 약식인 반배를 입었던 것이다.

 

마고자는 섶이 알맞게 여며져야 하고, 섶귀가 날렵하고 예뻐야 한다. 섶이 조금만 벌어지거나 조금만 더 여며져도 표가 나고, 섶귀가 조금만 무디어도 청초한 맛이 사라진다. 깃은 직선에 가까워도 안 되고, 너무 둥글어도 안 되며, 조금 더 파도 못쓰고, 조금 덜 파도 못쓴다. 안이 속으로 짝 붙으며 앞뒤가 상그럽게 돌아가야 하니, 깃 하나만 보아도 마고자는 솜씨를 몹시 타는 까다로운 옷이다.

 

마고자는 원래 중국의 마괘자에서 왔다 한다. 귀한 사람은 호사스러운 비단 마괘자를 입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청마괘자를 걸치고 다녔다. 이것이 우리 나라에 들어와서 마고자가 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고자는 마괘자와 비슷도 아니 한 딴 물건이다. 한복에는 안성맞춤으로 어울리는 옷이지만, 중국 옷에는 입을 수 없는, 우리의 독특한 옷이다. 그리고 그 마름새나 모양새가 한국 여인의 독특한 안목과 솜씨를 제일 잘 나타내는 옷이다. 그 모양새는 단아하고 아취가 있으며, 그 솜씨는 섬세하고 교묘하다. 우리 여성들은 실로 오랜 세월을 두고 이어받아 온 안목과 솜씨를 지니고 있던 까닭에, 어느 나라 옷을 들여오든지 그 안목과 그 솜씨로 제게 맞는 제옷을 지어 냈던 것이다. 만일, 우리 여인들에게 이런 전통이 없었던들, 나는 오늘 이 좋은 마고자를 입지 못할 것이다.

 

문화의 모든 면이 다 이렇다. 전통적인 안목과 전통적인 솜씨가 있으면 남의 문화가 아무리 거세게 밀려든다 할지라도 이를 고쳐서 새로운 제 문화를 이룩하는 것이다. 송자에서 고려의 비취색이 나오고, 고전 금석문에서 추사체가 탄생한 것이 우연이 아니다.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는 말이 있다. 예전엔 남의 문물이 해동에 들어오면 해동 문물로 변했다. 그러나 그것은 탱자가 아니라 진주였다. 그런데 근래에는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남의 것이 들어오면 탱자가 될 뿐 아니라, 내 귤까지 탱자가 되고 마는 것 같아 안타까울 때가 있다.

 

● 백사장의 하루

 

눈이 떠지자 창을 여니 아청빛 푸른 하늘이 문득 가을이다. 어제까지의 분망과 노고가 씻은 듯 걷히고 맑고 서늘한 기운이 흉금으로 스며든다. 소제를 마치고 나도 모르게 길에 나서니 오늘은 일요일이다. 등산객들과 소풍가는 남녀들로 근교행 버스는 바쁘다. 복잡을 피하여 사잇길로 빠지니 곧 경춘선로의

교차점이 아닌가. 예정 없이 버스에 올라, 가는 대로 맡기니 버스는 군말없이 달린다. 이윽고 강안을 지난다. 강이 아름다워 차를 스톱시키고 내리니 인적이 고요한 소양강 하류의 이름 모를 백사장, 하루의 유정을 풀기에 가장 좋을 곳인상 싶다. 백사장에 팔베개를 하고 누워 청한을 읊조린다. 단풍은 아직 일러 산봉우리는 푸르고 거울같이 맑은 물 위에 떠가는 구름이 가끔 짙은 시름을 던진다. 그러나, 끝없이만 보이는 백사장에는 갈매기 그림자 하나 없고, 10년에 한 번인 듯 느껴지는, 가물거리는 포범이 아쉽게 반갑다. 나는 누워서 문득 생각한다. 천추 일심이요 만리 일정이라고.

 

고왕금래 수년 만에 크고 작은 사건들이 우리를 흥분시키고 우리의 혈관을 끓어오르게 한다. 사책을 헤치거나, 전설을 뒤지거나 혹은 저기를 보고 혹은

소설을 읽다가도 옳은 것을 위하여 의분을 느끼고 악한 것을 위하여 증오하고 타기하며 사리에 그릇됨을 개탄하고 인생의 과오를 슬퍼함은 너나가 없건만, 매양 같이 슬퍼하고 같이 분개하던 그들이 한 번 현실에 발을 들여놓자 드디어 스스로 증오와 타기의 인간 비극을 되풀이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인간이 사는 곳에 비환이 있고, 비환이 있는 곳에 정회가 있다. 그러므로 비록 알지 못하는 고도의 이족과도 정은 통할지니 어찌 서로의 애정이 없으며, 저

가물거리는 포범과 같은 반가움이 없으랴마는 어찌하여 서로 적대하고, 시의해야 하며, 심하면 동족도 구수같이 상잔해야 하며, 이웃도 헤치고, 가족도 등지며 배반하고, 모해와 살육이 사상에 그칠 날이 없어야 하는가. 서로가 하루살이 같은 목숨이요, 창해에 뜬 좁쌀 같은 존재가 아닌가. 진부한 옛 말을 굳이 되씹어 본다. 와우각상에 쟁하사요, 석화광중에 기차신이란 감상적 애수가 스며드는 것은 최근 나의 과로로 인한 신경의 쇠약에서 오는 것일까.

 

천추의 느끼는 그 마음은 하나요, 만리에 느끼는 그 정은 하나다. 불가에서 생사를 허무에 돌려, 생야에 일편부운기요, 사야에 일편부운멸이라 했다. 그러나, 한 조각 구름은 떠난 뒤에 남는 것이 없지만 사람은 간 뒤에도 정이 남지 않는가. 고래로 뜬 구름같이 사라진 사람들이야 이제 그 잔해인들 남아 있으랴마는 인류가 존속하는 날까지 면면이 지속해 오는 것은 이 정이다.

 

불가의 만유귀심이란 그 법심이 무엇인지 모르거니와 심심심이 곧 정이다. 정근을 버리고 미망에서 벗어나 대오귀심을 외치는 대덕에게 심심심이 정이라면 속성의 완미함을 연민해할지 모르나, 나는 원래 그런 묘망한 진리와는 연이 없는 듯하다. 나에게 철학이 있다면 정의 철학이요, 나에게 생활이 있다면 정을 떠나서 따로 없다. 혹 나의 깨닫지 못하는 완미를, 혹 나의 지성 부족한 우둔을 비웃는 이도 있을지 모르나, 이것이 아니고는 인생을 맛보며 살 길이 없다.

 

인간이란 신과 짐승의 사생아라고 한 이가 있다. 그렇다면 정이란 사생아의 개성이다. 신은 이미 정을 초월해 있을 것이요, 짐승을 아직 이 정에 미치지

못했을 것이다. 지성이니 오성이니 하는 말은 영리한 사생아들의 엉뚱한 어휘다. 성리학자들은 성이니 정이니 하는 말을 여러 가지로 분석해서 설명한다. 심은 일신의 주재니 성과 정을 통솔하고, 성은 천부의 이니 칠정을 낳는다. 희노애구 애오욕은 기질의 청탁에 따라 때로 선이 되고 때로 악이 되지만 그 본원은 천명의 성이다. 그러므로 그 본질이 선일진대 중화의 덕을 길러 삼재의 하나로서 천지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합리적이요 오묘한 철리엔 둔하다. 또 굳이 형이상학적으로 그 본질을 캐고 체계를 세워 논리를 정리하는 수고를 청부받을 생각도 없다. 무릇 곡소비환이 생활의 표현일진대 이것이 진정이요 인생이 아닌가. 인생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심정의 세계를 나는 지금 체감하고 있다. 심이라 해도 좋고 성이라 해도 좋고 정이라 해도 좋다. 나는 적절한 용어를 모른다. 오직 천추일심만리일정, 심즉정이다. 심은 추상적인 존재요, 정은 구체적인 존재일 뿐이다. 이것이 실로 영속적인 생의 실체요 영속적인 인간의 내용이 아닌가.

 

흰 구름장이 바람에 불려 강상으로 떠가더니 산봉우리에서 사라진다. 강 속의 그림자도 사라진다. 문득 채근담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풍래소죽에 풍과우 죽불유성이요, 응도한담에 응법우 택불유경'

 

그렇다. 바람 간 뒤에 소리는 대밭에 남아 있지 않고, 기러기 날아간 뒤에 그림자는 담심에 머물러 있지 않다. 그러나 이것을 보고 느끼는 것은 오직

사람뿐이다.

 

나는 채근담 저자의 낯을 모른다. 그러나 지금 나는 그와 이야기를 하고 있다. 눈 위에 기러기 발자취는 흔적 없이 사라진다. 그러나 떨어지는 꽃잎에서

또 그것을 느껴야 한다. 이 곧 천추일심이요, 만리일정이다.

 

강안 길로 되돌아 허튼 걸음으로 한식경을 걸었다. 버스가 이삼 차 지나갔을 뿐 고요한 강안의 길이다. 길가에 한 주점이 있다. 막걸리 안주로 도토리묵이

있다. 요기하기에 족했다. 숭굴숭굴하고 부드러운 주모의 씩 웃는 인사가 제법 구수하다. 친절, 불친절 없이 늘 보는 이웃에 대하듯 태연한 인사, 영접을 위해서 마음을 쓸 필요조차 없는 한적한 주점인 까닭이다. 이해의 득실이 없으면 스스로 담연할 수가 있다. 그래서 오가는 말이 구수하다.

 

버스가 왔다. 손을 들어 차를 세우고 몸을 실었다. 녹색의 산봉우리들은 석양에 물들어 빛이 더욱 곱고, 강물은 그늘이 져서 검푸르게 흐른다.

 

/ 2020.04.06 편집 택..